미역국은 생명, 젖, 사랑입니다(2)[노경아]

 

 

미역국은 생명, 젖, 사랑입니다(1)[노경아]

https://conpaper.tistory.com/98725

미역국은 생명, 젖, 사랑입니다(2)

2021.12.02

 

쌀쌀해진 요즘 미역국을 자주 끓입니다. 큰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국거리용 한우와 불린 미역을 달달 볶습니다. 집 안에 고소한 참기름 향이 퍼지면 국간장을 넣고 다시 한번 볶다가 물을 넉넉히 붓습니다. 식탁 의자 하나를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져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국이 끓기를 기다립니다. 머릿속을 비우고 국 냄비만 들여다보면서 멍 때리기를 합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불을 줄이고 한참 더 끓인 후 마늘 두세 통을 다져 넣습니다. 미역국은 멍 때리기를 오래할수록 맛있습니다.

 

춥고 모임이 잦은 연말엔 미역국만 한 음식이 없습니다. 이른 아침 출근길, 속을 따뜻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술 마신 다음 날 속을 푸는 데도 최고입니다. 끓일수록 맛이 깊어지니 ‘오늘’보다 ‘내일’이 더 맛있어, 끓일 때마다 냄비 한가득 넉넉하게 끓이게 됩니다.

 

“우리 집은 요즘 거의 매일 귀 빠진 날 같아.” 미역국을 싫어하는 작은아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집니다. 아이의 감정과 상관없이 ‘생일’을 ‘귀 빠진 날’로 표현한 것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가 자식을 낳을 때 겪는 ‘산통’이 담긴 말이기 때문입니다.

 

‘귀 빠진 날’의 귀는 소리를 듣는, 그 귀가 맞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왜 사람이 태어난 것을 귀가 빠졌다고 표현했을까요? 태아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올 때, 귀 부분에서 산모도 아기도 가장 애를 먹는다고 합니다. 태아는 머리가 가장 큰 데다 귀가 양쪽에 튀어나와 있어 그런가 봅니다. 산파들은 아기의 귀만 빠져나오면 고비를 넘겼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아기의 귀가 보이는구먼. 이 고비만 넘기면 되니 조금만 더 힘을 내시게. 좀 더!” 땀으로 범벅이 된 산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의술이 신통치 못했던 시절, 여성에게 출산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몹시 어렵고 두려운 통과의례였습니다. 해산방으로 들어가는 임부들은 댓돌에 신발을 벗으면서 ‘다시 저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 죽음까지도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시인 옥영숙의 표현처럼 ‘폭염보다 무덥고 지독한 산통’ 끝에 무사히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힘겨운 몸을 일으켜 앉아 첫국밥으로 미역국과 흰밥을 먹습니다. 그러고 나서 찌릿찌릿 젖이 돌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미뤄뒀던 잠에 빠져듭니다. 미역국은 생명이고 젖이며 사랑입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출산 후 미역국을 먹은 이유는 미역이 몸속 상처를 낫게 하고 뭉친 핏덩이를 없애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역 등 해초의 효능에 대한 연구 결과들도 발표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미역은 무기질과 식이섬유, 비타민이 풍부해 산후 변비 예방에 좋을 뿐만 아니라 소화가 잘되어 산모가 먹기에 좋다”고 말합니다.

 

옛 문헌에서도 미역의 효능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산어보’에는 “임산부의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데 이(미역)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도 “해채(海菜), 즉 미역은 성질이 차고 맛이 짜며 독이 없다. 열이 나면서 답답한 것을 없애고 기가 뭉친 것을 치료하며 오줌이 잘 나가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옛사람들이 고래에게서 배워 산부에게 미역을 먹였다는 점입니다. 포유류인 고래는 새끼를 낳으면 미역밭에 가서 몸을 비빈다고 합니다. 새끼를 낳으면서 생긴 상처 부위를 아물게 하는 행동이라네요. 고래와 미역에 관한 많은 이야기 중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해지기를 옛날 어부가 물가에서 헤엄을 치다 새끼를 갓 낳은 고래가 물을 삼킬 때 함께 빨려 들어갔다. 고래 배 속으로 들어가 보니 배에 미역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갓 출산한 고래의 오장육부에 나쁜 피가 가득 몰려 있었지만 미역 때문에 모두 정화가 되어서 물로 바뀌어 배출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역이 산후의 보약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아이를 낳고 미역을 먹는 것이 우리의 풍속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몸에 좋은 미역국을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생일에도 먹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최근 한 커뮤니티에 시어머니 칠순 생일날 미역국을 끓였다가 혼난 사연이 올라왔습니다. 특이한 고민이라 댓글을 읽어 보니 비슷한 사례들이 눈에 띕니다. 대표적인 댓글 몇 개를 옮겨 봅니다.

 

“경상도에선 환갑부터 생일날 미역국 안 먹어요. 어른들 말씀이 생일날 미역국 먹으면 치매 걸린다고. 대신 소고기뭇국을 끓입니다.”

 

“60세 넘으면 생일날 미역국 안 끓이는 이유... 귀신이 미역국 몇 번 먹나 세고 있다가 나이가 많으니 저승 데려갈 때가 됐구나 한다고... 우리 시어머니는 미역국 말고 소고깃국 끓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친정 부모님은 미역국 드시는데, 시부모님은 오래오래 사시고 싶구나 생각했어요.”

 

"우리 친정 엄마도 65세 생일 때부터 뭇국 끓이자고 하시더라고요. 늙어서 생일에 미역국 먹으면 노망난다고. 치매랑 중풍이 젤 무섭대요. 다른 병 걸리면 혼자 아프다 죽지만 치매나 중풍에 걸리면 온 식구가 다 고생한다고 난리예요."

 

몸에 좋은 음식, 나쁜 음식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연령층인지라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댓글을 읽고선 몹쓸 병으로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부모의 마음이 읽혀 코끝이 찡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떠나 치매가 노망이 죽음이 무척 신경 쓰여 미역국을 먹지 않겠다고 했던 겁니다.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때문에 식구들이 고생할까 봐. 생일날 아침 정성껏 미역국을 끓인 며느리를 나무랄 때의 그 마음도 알 것만 같습니다.

 

부모님이 원한다면 생일날 미역국을 끓이지 마세요. 대신 소고기뭇국, 올갱잇국, 갈비탕, 추어탕 등 좋아하는 국을 끓이세요. 치매 예방에 좋은 책과 견과류 등 먹거리를 선물하는 것도 좋겠군요. 미역국은 귀 빠진 날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요.  <끝>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 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 담당 연구원, 이투데이 교열팀장을 거쳐 현재 한국일보 교열팀장.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Recent Articl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