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우리나라 길인가? [방재욱]

 

 

여기가 우리나라 길인가?

2021.11.26

 

지난 9월 영국에서 발간된 옥스퍼드 영어사전(OED,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우리말에서 유래된 영어 표제어 26개가 새로 등재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1884년에 출간되어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OED에는 현재까지 영어권에서 자주 사용되어 온 단어 60만여 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976년에 OED에 처음으로 등재된 우리말은 외국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지고 있는 '김치(kimchi)'와 '막걸리(makkoli)' 등이며, 지난 45년간 총 20개의 단어가 실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는 ‘한류(hallyu)’를 비롯해 대박(daebak), '치맥(chimaek)', 먹방(mukbang)', '언니(unni)', '오빠(oppa)' 등 26개의 단어가 한꺼번에 등재되며 우리나라 '문화의 힘'이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게 확산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말들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고 있는데 비해 우리 언어문화의 실제 현주소는 어떨까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띄는 ‘카페’라는 말을 보면 예전에 다방 이름이 카페로 바뀌기 시작할 때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내용은 대학가에 내부 장식을 비슷한 수준으로 꾸민 커피숍을 차려놓고, 가게 이름을 하나는 ‘카페 미네르바’로 걸고, 다른 하나는 ‘사랑방 다방’이라고 내걸었을 때 학생들은 어떤 집을 선호할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아마도 학생들은 ‘다방’보다 ‘카페’를 더 선호할 것이라는 것이 내 의견이었습니다.

 

 

 

길을 걸을 때 건물에 붙여진 영어로 쓰인 간판들을 보며 여기가 어느 나라 길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 실례로 ‘곱창집’ 명칭이 한글 한자 없이 ‘BOBAE GOBCHANG TOWN’이라고 게시되어 있고, ‘백합빌라’ 건물 간판이 한글 없이 ‘BACK HAB VIL LA’로 쓰여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반려동물 전문점에 ‘Dog & Cat Paradise’라는 명칭과 ‘야옹아 멍멍 해봐’라는 간판과 ‘Yaonga Mung Mung Hae Ba’라는 영어 간판이 함께 걸려 있는 것도 눈에 띱니다.

 

자주 산책을 하는 ‘양재천 헌수 수목 터널 길’의 상단 길을 걷다보니 오른쪽 도로 너머 길가에 있는 건물들에 게시된 영어로 쓰인 간판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도로 쪽으로 내려가 양재천로 198번부터 162번 사이의 200m 정도 되는 길을 따라 걸으며 간판 이름을 순서대로 적으며 살펴보았습니다. < > 안에 진한 글자로 표기한 것이 간판명입니다.

 

첫 간판은 주점 <MIETTE>로 건물 벽에 작은 글씨로 쓰인 <KONG Photo Studio & Gallery>라는 간판이 걸려있고, 옆쪽 건물 벽에 걸린 간판에는 작은 글자로 <ROOM SERVICE E COFFEE & SHOP 3F>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어지는 간판에는 상단의 작은 글자 <WINE SHOP> 아래에 <Cantina 칸티나 도곡점>이란 이름이 명기되어 있고, 이어지는 주점 <M MOISSONNIER> 간판의 옆쪽에는 <Made in FRANCE>라는 문자가 쓰여 있습니다.

 

입간판 <MEDICI e CAFE>에 이어 주방 물품 판매점인 <LINEKITCHEN>의 안쪽 유리판에는 <LINESTATE 2nd SHOWROOM>과 함께 <TOTAL SPACE KITCHEN & FURNITURE>라는 문구가 쓰여 있고, 건물 입구 위쪽에는 <norang>이란 입체형 간판도 걸려 있습니다. 이어지는 옆 건물 벽에 <꽃>이란 걸림 간판과 함께 <FLORET>, <FLORET FLOWER. CAFE>에 이어 <K-MDC BLUE-M> 간판 아래에는 걸림 간판 <NUIEUN>이 있습니다. 그 옆의 <쓸모 SSLMO>란 가게의 안쪽에는 한글로 <도자기 아카데미>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Book Gallery 24/48>과 <ART SPACE>에 이어 주점 간판인 <MANU TERRACE>, <마누 테라스>가 눈에 들어오고, 가구점인 <KING'S asset>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에는 소문자 <princess> 아래쪽에 <엔틱가구 갤러리 데코 인테리어>라고 쓰여 있습니다. 자동차 수리점에는 한글 없이 <SONIC>, <S Motors>, <S SONIC>, <SONIC> 등의 간판이 줄줄이 걸려있고, 주점 간판인 <EVERYDAY ovaco>, <ovaco>와 벽걸이 간판 <HIVE_STUDIO>, <PERSONAL TRAINING PILATES YOGA THERAPY 3F>에 이어 주점 <CUISSON 82>의 간판에는 <CUISSON 82 french bistro CUISSON 82, french bistro>라는 문구가 담겨 있습니다. 현관문 위에 <BAR Le82 cafe dessert>라는 주점명과 <cafe bar dessert>로 이어진 간판은 영동2교에 접해 있는 <BODYFRIEND>로 마감되고 있습니다.

 

많은 간판들 중에 우리말로 쓰인 간판이 고작 6개뿐인 길을 걸으며, ‘여기가 우리나라 길인가?’라는 상념이 머릿속을 감돕니다. 이는 간판을 무조건 우리말 중심으로 쓰자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라고 자랑하면서 현장에는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표기한 간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글은 시대와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탁월한 문자로 인식되고 있으며, 컴퓨터 이용 시 한글은 한자나 일본어에 비해 7배 이상 효과가 있는 탁월한 문자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를 거닐 때 간판은 물론 청소년들이 입고 있는 옷에서도 많이 눈에 띠는 영어(외국어) 문자를 보며, 우리말의 우수성을 우리 스스로가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고 있는 우리말에서처럼 길가의 간판이 진정한 ‘우리 문화’를 담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날이 기다려집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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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재욱

양정고. 서울대 생물교육과 졸. 한국생물과학협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약용작물학회 회장 역임. 현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과총 대전지역연합회 부회장. 대표 저서 : 수필집 ‘나와 그 사람 이야기’, ‘생명너머 삶의 이야기’, ‘생명의 이해’ 등. bangjw@cnu.ac.kr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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