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나무 이야기 [한만수]

 


동구나무 이야기
2022.07.06

차를 타고 농촌 도로를 달려가면서 유심히 보면, 농촌이라고 해서 별다른 특징이 없습니다. 농촌인데도 도시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단층이나 이층의 슬래브 형태의 양옥집 길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가 보입니다.

농촌 사람들 삶의 패턴도 도시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읍내 마트에 들러 식재료와 우유며 음료수를 사고, 저녁이면 각자의 집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으로 농산물을 판매하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어느 동네 앞이나 이삼백 년 묵은 동구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동네 진입로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동구나무가 눈에 띕니다. 동구나무는 동네 가운데 있는 공터에도 서 있지만 거의 동네 초입에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는 냇가로 가는 초입에 몇 구루의 동구나무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동구나무는 장터 쇠전거리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쇠전거리에 있는 동구나무는 장날이면 소장수들이나, 소몰이꾼이며 소를 팔거나 사러 온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한여름 무싯날에는 멍석을 깔아 놓고 노인들이 낮잠을 주무십니다. 쇠전거리 근처에 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아이들 몇 명이 퍼질러 앉아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땅따먹기를 하기도 합니다.

 

 



밤이 이슥해지면 10대 후반의 청소년들 차지입니다. 몇몇은 동구나무에 기대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기타를 치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우습지도 않은 말에 낄낄거리며 두런두런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세 곳에 있는 동구나무는 모두 10그루 정도 됩니다. 그 윗동네에 있는 동구나무 한 그루는 수령이 300년이 넘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무슨 이야기 끝에 동구나무 둘레가 몇 아름이나 된다는 것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달라서 일부로 몰려가 동구나무 허리를 재보기도 할 정도입니다.

정월대보름에는 동네 원로들이 시루떡을 해다 동구나무에 바치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오막살이집에 혼자 살고 있는 무당은 마당이 좁은 집에서 굿 의뢰가 들어오면 동구나무 밑에서 굿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동구나무가 워낙 크니까 여름에는 동구나무와 가까운 곳에 있는 집은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도 그늘이 침범을 할 정도입니다.

동구나무 거리에 사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고향의 상징과 같은 동구나무가 어느 날 사라졌습니다. 동구나무 밑에서 한담을 즐기던 노인이 다른 분들과 다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노인은 술에 취해 면사무소에 가서 동구나무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유인즉 밤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가을이면 낙엽이 마당까지 날아와서 비질하기 바쁘다, 동구나무 밑에 사람들이 모여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 너무 싫다는 점입니다.

그 노인이 술만 취하면 면사무소에 달려가 행패를 부리는 통에 결국 동구나무는 베어내기로 했습니다.

 

 


면사무소에서 일꾼들을 동원해서 동구나무를 베어낸다는 소문에 몇몇 주민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동구나무 거리에 사는 무당이 “동구나무에는 신령이 있어서 베어내면 사람이 죽을 거다.” 라며 앞장을 섰습니다. 주민들이 다시 면서기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면서기는 농민들의 상전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면서기는 더 화가 나서 미신 때문에 나무를 베어내지 못하면 바보 소리 듣는다며 계속 고집을 피웠습니다.

나무를 베어내려면 톱질을 할 줄 아는 일꾼이 있어야 합니다. 주민들은 물론이고 소재지에 사는 사람들 그 누구도 나무를 베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처에서 데리고 온 일꾼 두 명이 톱질하기 시작했습니다. 300년이나 동네를 지켰던 수호신이 잘려나가는데도 구경꾼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술만 취하면 면사무소에 달려가던 노인 혼자 감독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동구나무 제거 작업을 지시했습니다.

동구나무는 워낙 크니까, 잔가지 제거 작업부터 시작해서 점점 굵은 가지를 잘라내는 순서로 진행이 됐습니다. 낮술까지 마신 노인은 기고만장한 얼굴로 지시를 하다가 집체만한 가지에 깔려 압사했습니다. 잘려나가던 나뭇가지가 일꾼들이 기대하던 반대방향으로 떨어지는 통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말에 집에 있던 주민들이 벌떼처럼 뛰어 나왔습니다. 주검은 가마니에 덮여 있었고, 원망은 면서기와 무당에게 돌아갔습니다. 유가족들은 무당이 사람 죽으라고 기도를 했기 때문에, 노인이 돌아가셨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면서기를 에워싼 주민들은, 면서기가 무당말을 안 들어서 죽었다는 겁니다. 기고만장하던 면서기는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질려 발발 떨기만 했습니다. 주민들이 면서기 멱살을 잡거나, 팔을 잡고, 허리끈을 움켜쥐고 면사무소로 몰려갔습니다. 그 통에 인구 1천 명 정도가 사는 소재지에는 소문이 산불처럼 번졌습니다.

냇가 가는 쪽에 있는 동구나무는 버드나무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으로 길을 넓혀야 하는데도 베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동구나무가 사라진 것은 동구나무 밑에서 흐르던 실개천이 건천으로 변한 후에 말라 비틀어져서 저절로 죽었습니다.

입산금지로 산에 나무가 무성해지면서 실개천의 지류가 된 산 계곡의 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벌거숭이산에 비가 내리면 땅속으로 스며들었었습니다.

그 물이 땅속에서 아래로 천천히 흘러 계곡에는 1년 내내 물이 있었습니다. 숲이 무성해지면서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비닐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비가 오면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한 빗물이 한꺼번에 계곡으로 내려가서 흘러가고 나면 계곡은 말라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쇠전거리에 있는 동구나무는 지금도 건재합니다. 예전처럼 한 마지기 이상의 그늘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가지는 모두 사라지고 자기 몸 하나 간신히 건사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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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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