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달에는 찔레꽃 배지를 달자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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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달에는 찔레꽃 배지를 달자
2022.07.04
6·25전쟁 발발 72주기를 막 지났습니다. 국경일도 기념일도 아니어서 그날 국기를 내건 곳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간 6·25전쟁 기념식은 여기저기서 열어왔지만 별로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6·25가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지내오다가 겨우 10여 년 전부터 국가기념식으로 승격된 셈인데 여전히 국가적.사회적 관심도가 낮은 탓으로 그 흔한 뉴스도 잘 타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십수 년 간 현직 대통령이 참석한 건 딱 두 번뿐이었다니 말입니다. 그렇다 한들 우리의 마음속에서 6·25가 잊혀진 것은 아닙니다. 매년 현충일에 맞춰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을 기리는 계기에 자연스레 6·25를 상기하게 돼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바꿀 뻔했던 우리 현대사의 대사변(大事變)을 잊을 수는 없지요. 초등학교를 떠나서는 한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그 노래가 절로 떠오릅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 .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70여 년 전 동족상잔으로 형제자매와 이웃을 잃어야 했던 깊은 상흔은 아직껏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그무렵 제주에서 벌어진 또 다른 사변의 상처는 이제 다 아물어가고 있습니다. 특별법 제정으로 제주 4·3사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은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나아가 제주의 예술가들이 스스로 나서서 부모형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다채로운 문화예술 활동을 벌여오고 있습니다(오페라 '순이삼촌', 4·3 희생자 유물 사진전 시리즈, 4·3 주제의 소설 등). 국가의 책임으로 정리된 만큼 제주4·3에 대해서는 이처럼 물적, 심적 구제(救濟)가 잘 이루어져 오고 있습니다.
4·3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난 희생자를 낸 6·25는 딱 부러지게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없기에 희생자와 유족에게 주는 보상도 명목적일 뿐입니다. 사변의 원흉인 북한에 책임을 추궁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수많은 호국영령들은 지하에서 여전히 분노와 통한(痛恨)을 삭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럴진대 어찌 우리가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흔히 회자되듯 6·25가 '잊혀진 전쟁'이 되도록 이 상황을 내버려둔다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욕되게 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역사에 남는 큰 사건은 기록되고 기억되게 마련입니다. 기록은 역사가에게 맡기면 되지만 기억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기념일이나 추념일을 제정해서 연연이 기억을 새롭게 하기도 하지만 보다 효과적인 기억을 위해서는 의미있는 어떤 상징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상징물로서 꽃만 한 것은 없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인 11월 11일을 전후하여 서방국들은 국가 원수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모두 개양귀비꽃(poppy) 배지를 달고 다닙니다. 그 당시 밤낮없이 참호를 중심으로 일진일퇴하던 양 진영 사이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개양귀비는 대학살의 장면을 목격하면서 젊은이들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6·25를 기억하는 데에 딱 어울리는 우리의 꽃은 무엇일까요? 제주에서는 1948년 당시의 참상을 목격한 동백꽃을 4·3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동백꽃은 그 떨어지는 모습도 속절없는 죽음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다면 근 3년을 끈 6·25 대참극을 줄곧 목격한 것은 어떤 꽃일까요? 우리나라 산천과 계곡 어디서나 피는 꽃 중 가장 눈에 띄는 꽃은 찔레꽃입니다. 포성이 끊이지 않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쫓기고 쫓다가 찔레꽃 넝쿨에 넘어지고 가시에 찔리기도 하였을 터입니다. 사방으로 튀는 피에 흰 찔레꽃들이 붉게 얼룩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찔레꽃을 주제로 한 시나 노래는 슬픔과 함께 희망의 메시지도 품고 있습니다. 봄날은 가도 찔레꽃 필 무렵엔 기다리는 사람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이 땅의 많은 여인네들이 힘겹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지금도 기다리던 이는 온데간데없이 기억에서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찔레꽃 상징은 호국영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품는 데에 좋고,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아픈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더욱 깊이 새기는 데에도 좋을 것입니다.
호국영령의 희생뿐만 아니라, 이 땅에 와서 함께 싸우다 스러져간 우방국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오늘날처럼 꽃 필 수 있게 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방으로 위협받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기 위한 마음가짐으로서, 우리 땅에서 사라진 내외 모든 영령들의 희생을 높이 기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6·25 기념일에 즈음하여 우리 대통령이 보여준 생존 호국영웅과 호국영령의 유족에 대한 감사 표시와 격려는 참 잘한 일이라 생각되며 향후에도 이런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6·25의 희생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 그 날 남녀노소 모두가 찔레꽃을 가슴에 달고, 어렵사리 지켜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연말 즈음해 사랑의 열매를 달고 다니듯이 찔레꽃을 배지나 펜던트로 만들어 호국의 달인 6월에 달고 다니면 되는 일입니다. 우리 대통령이 보여준 적극적인 관심을 더 확대하여 내년부터는 대통령도 찔레꽃 배지를 달고 6·25전쟁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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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 뉴욕대(NYU) 석사,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거쳤다. 외교관으로 시작해 주 파나마, 주 이집트대사를 역임하고, 2010년부터 제주로 내려와 유엔 관련된 일을 하다가 2015년 초부터, 월드컬처오픈(WCO) 부회장, 서울국제음악제(SIMF) 조직위원 등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꽃나무와 텃밭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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