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농부의 자식농사 [한만수]

 

 

 

요즘 농부의 자식농사 [한만수]


요즘 농부의 자식농사
2022.06.03

요즘 시골에는 5일장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면 소재지 5일장에 나오는 상인들은 나이 드신 채소 장수, 생선 장수 몇 명뿐입니다. 읍내 장날이라고 해서 붐비지 않습니다. 장에 오시는 분들은 거의가 할머니 할아버지들뿐이고, 젊은 층들은 외국에서 시집온 다문화 가정주부들입니다.

​그 대신 대형 마트는 5개나 되어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읍에서 가장 큰 하나로마트는 어느 지역이나 비슷하겠지만 농민들이 많이 이용합니다. 마트 주차장에 오는 차량들을 보면 장을 보러 오는 손님이 읍내 사람인지, 면소재지에서 농사를 짓는 분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읍내에 사는 주부들의 차량은 거의가 소형차량이고, 농부 아내들이 타고 온 차량은 SUV 차량이거나 중형 이상급입니다. 소형차량에 실리는 상품은 마트에서 담아주는 비닐봉지인 경우가 많고, 중형 이상급 승용차 옆에는 카트에 넘치도록 상품이 담겨 있기 일쑤입니다.

농부의 아내와, 읍내 주부들의 장보기 분량이 차이 나는 점은 있을 것입니다. 읍내 주부들은 마트가 가까우니까 그날 저녁에 먹을 장보기를 한다면, 면소재지에서 올라온 주부들은 1주일분의 장을 보는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읍내 주부들은 그달에 결제를 할 수 있을 양만큼만 구입한다면, 농부의 아내는 마이너스카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청년층들이 도시에서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하기 전에는 동네 공터나 집 앞에는 1톤 포터 트럭이나 경운기가 전부였습니다. 요즈음은 젊은 농부들의 집 앞에는 거의가 농사용 트럭과 외출용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또래들 보다 시간적 여유도 많지만, 속사정이야 어떻든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난 5월 2일 자에 소개했던 이발사 희준이를 농협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출판사에서 인세가 얼마나 입금이 됐는지 확인 차였습니다. 요즘처럼 현금지급기계가 설치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창구에 통장을 내밀어 확인을 했습니다.
희준이가 포도밭에서 오는 중인지,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쓴 차림으로 농협에 들어섰습니다. 무슨 볼일을 보러 왔냐고 묻자 아들에게 생활비를 입금해 주려고 왔다는 겁니다.

“뭔 생활비를?”

희준이는 일찍 결혼을 해서 큰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했으면 어디 취직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물었습니다.

“아! 큰 애 대학교 졸업했잖아. 아직 취직을 못 해서 매달 백만 원씩 부쳐주고 있어.”

희준이는 자랑스럽게 말을 하며 품에서 통장을 꺼냈습니다. 창구직원에게 계좌번호가 적혀 있는 쪽지를 주며, 백만 원을 이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야! 취직 못 했으면 내려와서 포도농사나 지으라고 하지. 뭔 놈의 생활비를 매달 송금해 주냐?”
희준이가 기다리는 동안 자판기에서 뺀 커피를 내밀며 자연스럽게 물었습니다.

 

 


“너는, 애들이 아직 어려서 자식이 대학교 들어가면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모르지?”


희준이는 아직도 둘째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면서, 지금은 큰 애가 졸업을 해서 등록금이 절반만 들어간다. 둘이 대학교에 다닐 때는 등록금을 제외하고, 생활비며 용돈으로 매달 2백만 원씩 입금을 해 줬다. 집에서 포도 농사나 지을 거면, 왜 비싼 돈 들여서 대학교를 졸업시켰겠냐? 큰애는 은근히 서울 생활을 접고 집에 와서 나하고 포도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데, 애 엄마하고 내가 절대로 내려오지 말아라. 생활비는 취직할 때까지 부쳐 줄 테니, 취직해서 서울에 눌러살 생각을 하라고 했다며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희준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희준이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당당해 보여서 토를 달 수가 없었습니다.  

희준이의 둘째 자식은 대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취직을 했다며 만날 때마다 자랑을 늘어놨습니다. 몇 년 후에는 결혼까지 했습니다.

큰아들은 그때까지 변변한 직장이 없어서 계속 생활비를 입금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제 자식이 아니라서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군대까지 갔다 온 자식이 부모가 붙여주는 생활비에 의지하며 산다는 생각을 하면 공연히 화가 났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을 해 보면 희준이의 고집이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이, 이발소 꼬마로 시작해서 이발소 사장으로, 몇천 평 포도밭 주인이 되기까지는 고난의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포도밭에서 우리 또래의 농사꾼들보다 젊은 농사꾼들을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대부분 20년 이상 농사를 져 온 까닭에 농사에 대한 지식도 풍부합니다. 귀농을 하는 청년들은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져 온 세대보다 젊은 층들에게 배우려고 듭니다.

젊은 층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읍내 아파트에 살면서 농장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두고 출퇴근하는 농부들도 제법 많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도 활발하게 운용이 됩니다.

희준이 자식들은 귀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희준이 혼자 컴컴한 새벽이면 포터를 몰고 집을 나섭니다. 가끔은 "공지 사항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라며 주민들에게 방송도 하고, 저녁이면 술에 취해 껄껄 웃으며 술집에서 나오기도 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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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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