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연금술사들의 비명 [정숭호]

 

 

 

대한민국 연금술사들의 비명 [정숭호]


대한민국 연금술사들의 비명
2022.04.28

지난 월요일(25일) 아침, 국회의장의 중재안에 여야가 합의한 검수완박법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거냐를 주제로 여야 정치인과 교수, 기자가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아침 뉴스쇼에 눈을 박고 있었습니다. “검수완박법이 이대로 통과되면 서민이 피해를 본다”는 말이 제일 깊이 박혔습니다. “경찰이 인력 부족, 시간 부족, 그리고 능력 부족으로 대충 수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경우 좋은 변호사를 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억울한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검경수사권 조정이 시행된 작년 1월 이후 경찰서마다 이런 일이 쌓이고 있다”라고 하니 '늙었지만 행실을 더 가다듬어 매사에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간혹이라도 운전할 때는 더 조심하고, 길에서도 행여 다른 사람과 어깨가 부딪히지 않도록 조신히 걷고, 젊은 여자 지나갈 때 눈길 오래 주지 말고, 지하철 같은 데서 하는 짓이 법도에 어긋난다고 남의 집 아들딸이나, 주책 부리는 늙은이를 꾸짖거나 참견하지 말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내 참견이 시빗거리가 되어 경찰서까지 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내가 조심할 수밖에.

이런 생각에 빠진 채 뉴스쇼를 보고 있는데, 화면 아래 흘러가는 작은 글씨 자막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달걀값 8개월 만에 다시 8,000원대로 올라”, “인도네시아, 팜유 수출 전면 중단”이라는 경제 뉴스였습니다. 패널들이 저마다 열을 올리는 검수완박법보다 제목만 잠깐 흘러 지나간 이 뉴스가 더 ‘쇼킹’했습니다. 달걀은 달걀대로, 팜유는 팜유대로 신경 쓰이는 뉴스였습니다. 둘 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해바라기씨나 곡물로 만드는 사료 등 원자잿값이 오른 탓이지만, 곧바로 내가 영향을 받게 됐습니다.

 

 



작년에 달걀값 올랐을 때 달걀 세일하는 마트를 많이도 찾아다녔습니다. 한 판에 8,000~9,000원 할 때였는데 서너 곳 되는 집 주변 마트 중 어느 한 곳에서 달걀을 5,000~6,000원에 세일한다는 문자가 날아오면 아내는 어김없이 달걀 사냥을 나갑니다. 둘만 사는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나도 따라갑니다. 마트에서는 가구당 한 판만 파니까 둘이 따로따로 한 판씩 사 들고 옵니다. 어떨 때는 혼자 사 올 때도 있었습니다. 달랑 달걀 한 판 손에 들고 마을버스를 타거나 한 20분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게 창피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놈의 달걀 세일 문자만 날아오면 눈을 반짝이며 달걀 사냥 가는 아내 모습이 좀 안쓰러웠고, 나는 마감이 코앞인 칼럼 쓰기 등 급한 일 미뤄놓고 아내 심부름 가는 게 어떨 때는 짜증 났고 어떨 때는 귀찮았던 겁니다. 달걀값 다시 오르면 그 짓 또 해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팜유 수출 중단은 라면값과 연결됩니다. 팜유는 라면의 핵심 원료입니다. 팜유 없이는 라면을 못 만듭니다. 팜나무 열매를 쪄서 짜낸 팜유는 인도네시아가 주요 생산국입니다. 인도네시아산 팜유로 라면을 만들고 있는 우리나라 라면 업체는 3개월분 팜유를 비축하고 있답니다. 조만간 라면값이 오를 가능성이 높아진 거지요. 라면을 못 먹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문제지요.

 

대한민국 연금술사들의 비명 [정숭호]
라면 맛을 더해주는 대파도 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사진:필자]


라면값은 팜유 아니어도 오를 태세였습니다. 역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가루값이 이미 크게 올라 동네 식당이 못 견디겠다며 칼국수와 짜장면값을 올린 판에 라면 제조업체인들 값 올려서 원가 벌충할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팜유는 아이들 과자에도 많이 들어갑니다. 과잣값도 오를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팜유가 안 들어오면 과잣값도 머지않아 오르겠지요. 가끔 오는 손녀들에게 할아비 생색내려면 과자 세일 광고도 놓치면 안 되게 됐습니다. 라면 세일도 마찬가지고.

이게 다 내가 연금술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직장 후배가 어느 날 “형, 요즘 어떻게 지내요? 안 바쁘면 술이나 한잔 사요”라며 연락하기에 “연금 받아 사는 연금생활자가 무슨 술이냐, 물이나 마셔야지”라며 농반진반 던졌더니 “아, 연금술사는 연금 아껴야지요. 허허허”라면서 끊었습니다.

 

 



다른 수입 없이 연금만으로 살아야 하는 노년층은 연금술사가 맞습니다. 매달 나오는 연금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오르니 세일하는 마트만 골라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술수를 부려야 하니까 연금술사인 겁니다. 아내는 어제 대파 한 단에 990원이라는 세일 문자 받고는 "늦으면 없어질 거"라며 종종 걸음으로 마트로 갔습니다. 대파값은 보통 때는 2,000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의 많은 연금술사가 연금술을 부리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연금 액수가 공무원이나 교사, 군인 출신 노인들보다 많이 적은 국민연금 생활자들의 비명이 더 클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땅의 연금술사들은 검수완박법 때문에도 짜증이 나고, 물가 때문에도 짜증 나고 우울해졌을 겁니다.

이제 대한민국 연금술사로서 진짜 비명 크게 좀 지르겠습니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만, 당선자는 그 문제 젖혀놓고 나쁜 놈들부터 먼저 잡아들이시오. 거악을 척결하시오. 그놈들 잡아 벌주면 먹고사는 문제 해결하기 쉬워지오. 대한민국이 다시는 거꾸로 가지 않을 거요. 먹고사는 문제는 그런 거 잘하는 전문가들-지난 정권 거치면서 희귀해졌겠지만 멸종은 안 했을-을 찾아서 맡기고 당신은 당신이 수십 년 갈고닦아온 주특기를 발휘하시오. 그 덕에 당선됐으면서 딴소리하면 어떤 지지자가 앞으로 지지하겠소?”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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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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