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의 노래는 삶의 에너지[정달호]
벌의 노래는 삶의 에너지
2022.04.08
지난달 중순을 넘어설 무렵 뜰 뒤편 언덕배기에 뒷산과 경계를 이루어 서 있는 십수 년생 벚꽃나무들에 옅은 분홍빛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네인 서호동보다 더 남쪽 호근동의 벚꽃 가로수 무리보다는 늦었지만 올봄 초입엔 기온이 다소 높았던지 산기슭에 있는 우리 집에도 벚꽃이 예년에 비해 좀 일찍 핀 셈이지요. 자세히 보려고 언덕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처럼 웅장한 소리가 나기에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벌의 소리, 벌의 노래였습니다. 올해 벌떼 소리로는 처음이었습니다.
윙윙거리는 벌떼 소리는 늘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봄의 소리이자 삶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입춘이라고 하지만 딱 그 시점에 봄이 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봄은 입춘이 지나고 눈 녹은 시냇물 소리와 함께 오기도 하고 이른 봄꽃을 따라오기도 하죠. 순간순간이 다른 요즈음 저에게 봄은 벌의 노래와 함께 오는 것 같습니다.
매우 독특한 집단생활을 하는 벌은 유난히 일을 많이 하는데 그들은 일 하면서 춤을 추기도 합니다. 부분 색맹인 벌이 꽃을 맨 처음 발견하면 춤을 추면서 꽃의 방향을 가리켜 동료들을 부른답니다. 그래서 벌은 늘 무리를 이루어 일을 하는 것이죠. 꽃이 바로 가까이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몸짓으로 신호를 한다고 합니다. 일만 하는 줄 알았던 일벌이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벌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떼를 지어 윙윙거리는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몸짓을 보노라면 삶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새벽 어슴푸레 안개 낀 날이나 곧 빗방울이 떨어질 듯한 습한 날에도 사람보다 먼저 일어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 벌들을 보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죠. 저 여린 것들이 햇볕도 없는 이런 축축한 날씨에 꽃밭을 헤집으며 공동체를 위해 꿀을 따고 있는 그 부지런함이라니.
늦봄 꽃밭 중앙에 높게 솟은 아그배나무를 뒤덮은 작은 꽃들을 둘러싸고 만들어 내는 벌떼의 거대한 음악은 보는 이를 아연하게 합니다. 한여름 현관 앞 커다란 느릅나무에 하얀 꽃들이 눈을 덮어쓴 듯 만발하면 웅대한 벌떼의 노래 소리가 거실에까지 들려옵니다. 바람 소리나 새 소리, 시냇물 소리처럼 자연이 만들어내는 음악이죠. 늦겨울 매화부터 가을 국화까지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이 없다면 벌의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꽃이 없으면 벌도 없고 벌이 없으면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할 터이니 꽃과 벌은 최상의 공생관계이군요.
얼마 전 포천에서 취미로 양봉(養蜂)을 하는 친구가 벌통에서 딴 꿀을 대짜로 한 통 가지고 온 김에 같이 식사를 하면서 벌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호기심이 가시지 않아 벌에 대해 여기저기 좀 찾아보기도 하였습니다. 역시나 꿀벌(honey bee)은 참 특별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벌 무리(colony)마다 여왕벌 한 마리를 둘러싸고 수벌(drone) 몇 백 마리에 일벌(worker) 수천 마리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 꿀을 채취하는 일벌은 다 여성이죠. 일은 하지 않고 생식만 하는 여왕벌은 서너 해까지도 살 수 있는데 일벌은 계절에 따라 고작 몇 주 또는 몇 달을 살면서도 집단을 위하여 일만 합니다.
여왕벌은 생애에 몇 번 바깥으로 날아가 수정하는데 수벌 여러 마리로부터 동 시간대에 수정을 한다죠. 그 운 좋은 수벌들은 이 여왕벌과는 다른 무리 소속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왕벌이 나와서 수벌 무리쪽으로 온갖 수벌들이 구애를 하며 경쟁을 호는데 여왕벌은 그중 가장 적합한 수벌들과 관계를 한다고 하니 참 유별난 풍속입니다. 수정을 한 여왕벌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알을 낳는데 그전에 어린 일벌들이 방(cell)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해놓는답니다. 수벌들은 일도 하지 않고 공동의 식량인 꿀만 먹고 지내다가 여왕벌에 씨를 뿌린 놈들은 즉석에서 죽고 나머지는 겨울에 일벌들에게 쫓겨나 죽게 되지요.
꿀은 일벌들이 꽃의 화밀(花密, nectar)을 빨아 입속에 넣어 어린 일벌들에게 전달하여 저장한다고 합니다. 어린 일벌들이 꿀을 입속에서 숙성시켜 뱉어내는 것이 로얄젤리(royal jelly)입니다. 일단은 여왕벌과 일벌 애벌레들이 로얄젤리를 먹고 사는데 나중에는 여왕벌만 평생 이걸 식량으로 한다죠. 그래서인지 여왕벌은 다른 벌들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더 멋지게 생겼습니다. 여왕벌의 기능이 떨어지거나 유고가 생기면 일벌들은 애벌레 중 장래성이 있는 것들을 골라 여왕벌로 키우는데 그중 최적의 한 마리만 여왕벌이 되고 나머지는 다 제거된다고 합니다. 조직의 질서를 엄중히 지켜나가는 가차없는 벌의 세계입니다.
애벌레들이 좀 크면 일벌들이 날개 아래에 달고 오는 꽃가루, 즉 화분(花粉, pollen)을 먹고 산다지요. 어린 일벌들이 벌집을 청소할 때 쓰는 재료를 프로폴리스라고 하는데 이 또한 일벌들이 나무의 싹이나 관목 같은 데서 채집해 온다고 합니다. 프로폴리스는 광택으로도 쓰이는데 수백 년 전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에 붉은 빛을 입히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얘기가 있죠. 일벌은 또 배 아래 부분에서 밀랍(wax)을 만들어 촘촘한 집들을 짓기도 합니다.
꿀을 만들어 저장하고 여왕벌을 위한 로열젤리와 어린 벌들을 위한 화분까지 채취하고 프로폴리스와 밀랍까지 만들어대야 하니 정말 일벌은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가는 가련한 존재들이죠. 밥 하고 빨래하고 농삿일 하면서 아기까지 낳아 키워야 했던 지난 시대 우리 여인들의 신고(辛苦)의 생애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별 하는 일도 없이 꿀만 축내다가 겨울에 쫓겨나는 수벌은 은퇴 후 가사에 별 도움을 보태지 않고 빈둥대는 이 시대 가장들의 처지와 궤를 같이한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가는군요.
벌들의 겨울나기가 참 독특합니다. 벌통 안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일벌들이 여왕벌을 중심으로 겹겹이 둥글게 에워싸서 27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바깥을 지키던 일벌들은 안쪽 벌들과 교대를 하면서 전체적으로 체온을 유지한다고 하니 이들의 생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별로 역할이 구분됨은 물론 세대간 작업 배분 등 공동체의 질서를 어김없이 지켜야만 함께 생존할 수 있는 무리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미물들이지만 인간사회가 본받아야 할 자질인 것이죠.
축적한 잉여의 꿀과 화분, 프로폴리스, 밀랍 등 벌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양봉 벌은 보통 서양종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910년대에 서양인들이 전해주어서 키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키워 온 것으로 기록돼 있는 재래종도 양봉 목적으로 키우기는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외 야생 벌들은 나무 속이나 돌 같은 자연적인 둥지에 벌집(beehive)을 짓고 꿀을 만듭니다. 인간 못지않게 곰이나 꿀오소리(honey badger) 같은 다른 동물들도 자연 꿀을 탐하는데 가끔은 이들이 동네로 내려와 벌통을 습격하는 일도 일어난다고 하지요.
꿀이다, 화분이다, 뭐다 해도 벌이 꽃 속을 들락거리면서 수분(受粉, pollination) 활동으로 작물에 열매를 맺게 해줌으로써 인류가 먹고사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세계적으로 꿀벌 개체가 대량 감소하여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살충제, 그리고 내성이 강해진 응애와 같은 기생충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죠. 결국 인간의 지나친 개발 행위가 이런 암울한 현상을 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보다 더 부지런한 벌들이 만드는 음악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봄날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이로움을 주면서 삶의 에너지까지 주는 벌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벌들이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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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 뉴욕대(NYU) 석사,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거쳤다. 외교관으로 시작해 주 파나마, 주 이집트대사를 역임하고, 2010년부터 제주로 내려와 유엔 관련된 일을 하다가 2015년 초부터, 월드컬처오픈(WCO) 부회장, 서울국제음악제(SIMF) 조직위원 등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꽃나무와 텃밭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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