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꽃 피워 여름에 열매 맺는 비파나무 [박대문]

 

겨울에 꽃 피워 여름에 열매 맺는 비파나무
2022.02.28

 

겨울에 꽃 피워 여름에 열매 맺는 비파나무 [박대문]
비파나무. 장미과, 학명 Eriobotrya japonica (Thunb.) Lindl


눈 시리게 파란 겨울 하늘, 푸른 잎새 사이로 희끗희끗 드러나는 꽃송이, 무등산 입구 동적골에서 만난 비파나무꽃입니다. 꽃이 귀한 겨울철에 야지(野地)에서 꽃을 피운 비파나무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동절기에는 야지에서 꽃을 만나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부지방에는 간혹 볼 수 있지만,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겨울에 꽃 피운 초목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까요.

봄, 여름에는 사방천지에 다양하고 무성하게 피어나던 온갖 꽃들이 가을 지나 한겨울이 되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사라집니다. 잎새 떨군 나무의 빈 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파란 하늘이 차갑고 을씨년스럽습니다. 가을철까지만 해도 파란 하늘이 곱고 시원해 보이는데 왜 겨울의 파란 하늘은 한기(寒氣)가 돋고 스산해 보일까?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감정 상태가 이토록 변하는 것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하는 사람 역시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살아가야만 하는 수만 생물 가운데 오직 한 종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냥 흘려넘겼던 천자문(千字文) 문구가 떠오릅니다. ‘한래서왕 추수동장(寒來暑往 秋收冬藏). ‘추위 오면 더위 가니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감추어 저장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자연 순환에 맞춰 사는 것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뜻하는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평이한 듯하면서도 하늘과 땅의 현상, 중국 역사, 역대 인물과 지명, 지식이 담겨있는 사언절구 250구로 구성된, 그리하면서도 단 한자도 겹침이 없는 고시(古詩)입니다. 한자 입문서이지만 고금의 명저(名著)인 천자문에 갑자기 경탄이 일며 번뜩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꽃 사진과 관련하여 칼럼을 쓰다 보니 꽃이 지고 없는 한겨울이 되면 항시 남모르는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겨울에 잎이 마르지 않고 꽃이 피는 식물 종이 풍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수년간을 겨울철에는 겨울에 만날 수 있는 식물을 중심으로 글을 쓰다 보니 이제 그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언제부터인가 동절기만 되면 이번에는 어떤 식물 종을 소재로 글을 쓸 것인지, 은근히 땟거리가 부담됩니다. 나름 글 소재를 우리나라에 자연 서식하며 동절기에도 멋진 꽃이나 열매를 보여주는 종(種)으로 한정하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추위 오면 더위 가고 가을 오면 거둬들이고 겨울 오면 감추고 저장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그러함에도 겨울에 꽃을 피우거나 고운 열매를 매달고 있는 식물을 찾는다는 것은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에 벗어난, 예외적인 사항을 찾는 일이라서 천자문의 기본상식을 망각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 만난 비파나무는 추위가 한창인 2월에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꽃이 절정은 지났지만, 아직 남아 있었고 아련한 향까지 풍기고 있었습니다. 추위는 매서웠지만, 때마침 날씨가 맑아 파란 하늘이 돋보이고 그 아래 피어 있는 비파나무꽃이 유달리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추위를 견뎌내기 위한 자구책인 듯 꽃에도, 이파리에도 자잘한 갈색 솜털이 촘촘히 붙어있었습니다. 꽃을 피워 겨울을 나며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비파나무의 생존 비책의 하나라 여겨집니다.


겨울에 꽃이 피고 여름에 열매를 맺는 비파나무


비파나무는 따뜻한 남부 지방에서 자라는 아열대성 식물입니다. 나무 이름치고는 다소 생소하게 비파라는 악기의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이름의 유래는 잎 모양이 중국의 전통 악기인 비파와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중국 후베이성 및 쓰촨성 남부가 원산지인 비파나무는 중국 남부에 널리 심고 있는 나무로서 12세기경에 일본으로 전파되어 재배된 기록이 있고, 17세기 이후 일본에서 다양한 품종이 개발되어 일본의 과일로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직접 또는 일본을 통하여 도입되어 남부 지역에 재배하였으나, 최근에는 거의 재배하지 않아 옛날에 심은 개체들이 남부 도서 지역의 집 근처에 일부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과일로는 드물게 겨울에 꽃이 피고 다음 해 여름에 노란 황금빛의 살구 모양의 열매가 달립니다. 향이 있고 맛도 좋은데 국내에서는 웬 까닭인지 품종 개량이 진행되지 않은, 잊힌 과일 작물이 되어 대량으로 재배하거나 즐겨 심지 않아 다소 희귀합니다. 열매는 주로 6~7월에 수확합니다.

어린 가지에 갈색 털이 많고 잎은 어긋나며 긴 타원형의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드문드문 나 있습니다. 잎 뒷면에도 갈색 털이 밀집하며 잎이 두터운 가죽질입니다. 꽃은 겨울에 가지 끝에서 원추꽃차례로 피며 흰색이고 향기가 있으며 꽃차례에 갈색 털이 촘촘히 나 있습니다.

비파나무 열매인 비파는 과일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살구를 닮은 열매는 즐겨 먹기도 하지만 열매뿐만 아니라 잎과 줄기, 꽃, 나무껍질까지 버릴 게 없이 귀한 약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약재로 취급한다고 합니다. ​옛말에 ‘비파나무가 자라고 있는 가정에는 아픈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파는 항산화, 피로 해소 등 각종 효능을 갖춘 웰빙 식품이라 합니다. 그만큼 좋은 약효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무입니다.

꽃을 쪄서 꿀과 섞어서 쓰면 찬바람을 쏘여 걸린 감기를 치료하며, 목을 윤택하게 해서 기침을 멎게 해준다고 합니다. 또한 '본초강목'에 의하면 비파는 갈증을 풀어주며, 폐의 기(氣)를 잘 다스리고, 숙취 해소에 좋으며, 구토와 구역질을 멎게 하고, 산후의 입 마름을 치료하며, 비파 달인 즙을 마시면 당뇨병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가 반위(지금의 위암)라는 병에 걸렸을 때 비파 차를 달여 복용했다고도 합니다.

보통의 나무와 달리 겨울에 꽃을 피워 추위를 이겨내고 겨울을 넘긴 이듬해 여름에 열매가 성숙합니다. 이것은 비파나무의 잎, 여린 가지, 꽃차례를 둘러싸 추위와 병충해를 방지하는, 강한 생명력의 모체 역할을 하는 솜털 덕분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잎과 껍질까지 약재로 사용하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할 것입니다.

 

 



비파나무는 보통의 나무와 달리 차가운 환경에서도 강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는 만큼 다른 식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한 성분의 물질을 함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나 사회생활에서도 느끼는 바지만, ’뭔가 특별한 것은 뭔가 다른 게 있다.’라는 것을 비파나무로부터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됩니다.

 

(2022. 2월 무등산 동적골에서 만난 비파나무)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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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가 있다.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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