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회의록 왜 감추나
‘내로남불(naeronambul)’은 영문자로까지 표기되는 세계적인 한국어 단어가 됐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해 4·7 보궐선거에서 이 단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특정 정당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어떤 조사와 논의를 통해 얻은 결과인지에 대해선 설명이 없었다. 그런데 선관위는 최근 ‘내로남불’을 3·9 대통령 선거용 현수막이나 피켓에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채 1년도 되지 않아 기존 유권해석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에 선관위 측은 공식 선거운동 개시 전날인 지난 14일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대국민 발표문에 그 답이 있다고 했다. 발표문을 보니 “국민의 눈높이와 시대 변화에 맞게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대목이 있었다. 20여 문장 중 하나였다. 선거운동 직전 위원장이 나름 ‘알아두시라’고 유권해석의 새 기조를 밝힌 것이었는데, 숨은 코드 찾기처럼 A4 용지 3쪽 중간에 슬쩍 들어가 있었다. 이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없었다.
선관위는 야당 국회의원의 질의서를 받자 “그간 비판이 있어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제출했고,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현수막 관련 법규 운용 기준을 마련했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현수막 기준을 여야 막론하고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는 입장을 추가로 냈다.
그렇지만 정치권은 “황당하다” “결국 작년 유권해석이 틀렸다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선관위 내부에서 유권해석의 방향을 확 틀어버린 꼴이 됐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늘렸는데도 의혹의 시선을 받는 건 그동안 선관위가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임 중인 선관위원 7명 가운데 6명이 친여 성향으로 분류되는 상황도 그 이유일 것이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봤듯, 심판의 공정성이 한번 무너져 버리면 그 이후론 뭘 해도 의심받게 된다.
선관위 유권해석은 선관위원 회의가 소집돼 논의된다. 이견이 있으면 다수결로 정한다. 투표 결과가 동수이면, 위원장이 한 표를 더 행사하는 관례가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인 선거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선관위원 회의가 ‘밀실’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웬만한 국가 위원회는 회의록을 공개하고, 헌법재판소도 개별 재판관의 소수 의견을 공개한다. 그런데 선관위는 회의록을 꽁꽁 감춘다. 선관위 다수 직원은 선관위원 회의가 열리는 청사 4층 회의실에 가본 적도 없고, 뭐가 어떻게 논의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노 위원장은 “법과 원칙대로” “여야를 막론하고 일관되게 기준을 적용” “투명하게 선거 절차를 공개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선관위 회의록을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투명하게 알리면 괜한 오해도 사라질 것이다.
노석조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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