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방과 로스코 방(Rothko Room)[허찬국]

 


사유의 방과 로스코 방(Rothko Room)
2022.01.07

작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문을 연 ‘사유의 방’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박물관 앞 넓은 연못이 꽁꽁 얼어붙은 몹시 추운 크리스마스 다음 날 가보았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빼어난 청동 불상(​佛像) 두 개를 종전에 전시하던 유리 상자에서 꺼내 별도의 공간에 나란히 배치하는 창의적 발상으로 큰 상승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죠.

박물관의 소개문이 전시를 간략히 잘 설명합니다. “사유의 방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공간이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면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다. ... (중략)...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주요 문화재들은 족보가 잘 알려지는 것과 달리 이 불상들은 탄생 이후 20세기 초까지의 행적이 불분명함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방 밖의 벽에 길게 가로로 비쳐지는 ‘순환(Cycle)’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아트도 좋아 방을 나온 후 맞은편 벽걸이 의자에 앉아 한참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둡고 조용한 ‘사유의 방’에 들어선 순간 런던 테이트현대미술관(Tate Modern, 이하 테이트)의 ‘로스코 방(Rothko Room)’이 떠올랐습니다. 전자는 약 1,400년 전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종교적 대상이라는 의미가 중요한 예술품을 전시한 곳이고, 후자는 20세기 미국 화가의 추상적 그림들을 보여준다는 점이 명확히 다르지요. 하지만 어둡게 조명된 사유의 방과 로스코 방은‘ 인간사에 대한 깊은 생각’이라는 근본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테이트를 처음 찾았을 때 로스코 방을 보았습니다. 한 면이 약 3, 4미터인 어두운 적색조의 대형 그림들이 전시된 어두운 공간이었습니다. 많지 않은 관람객이 앉아 있거나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작품들과 방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했습니다. 화가와 그 방의 배경을 더 알고 난 후 기회가 될 때마다 다시 찾았습니다.

테이트 로스코 방의 작가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러시아 혁명 이전에 러시아(현재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났고, 가족이 1913년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추상회화의 본질과 형상에 혁명을 일으킨 미국인 화가”였던 그는 혁명, 전쟁, 대공황 등 세계적 참사로 점철된 20세기 전반의 격랑 속에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유태계인 그의 가족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진행된 유태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을 뜻하는 포그롬(pogrom) 위협에 시달렸고, 이민 온 미국에서는 1930년 시작해 10년 넘게 이어진 대공황으로 대량 실업과 빈곤이 만연했던 시기에 젊은 예술가와 가장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50대에 들어 명성이 높아져 경제적 여건이 좋아졌지만 말년에는 건강과 가정 문제로 어려운 환경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부(富)의 과시를 싫어하는 그의 성향이 로스코 방이 탄생하는 원인(遠因)이었습니다. 1950년대 말 지어진 시그램 빌딩 내 고급 식당의 내부를 장식할 그림을 의뢰 받아 수년에 걸쳐 시그램 벽화 연작(Seagram Murals)으로 알려진 40여 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부유한 손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곳을 가 본 후 많은 계약금을 돌려주고 그림을 팔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Red’라는 연극이 몇년 전 국내에서도 상연되었습니다.

 

 


로스코의 그림을 전시하려는 테이트 미술관이 적극적으로 나서 1960년대 후반 벽의 색깔, 조명 등 전시 조건 등 여러 차례의 협의를 진행했고, 그의 사후 시그램 벽화 연작 9점을 기증 받아 로스코 방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추상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화가라고 분류되지만 활동 기간 동안 작품의 특징은 달라집니다. 후반기 작품은 입체감이 전혀 없고(all-over), 사각형과 같은 단순한 형상과 몇 가지 색채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color-fields). 이제 이런 이미지들은 그의 명함과도 같습니다. 테이트 로스코 방 밖에는 이런 기법의 선구자로 여겨 작가가 좋아했다는 모네의 수련 그림(사진 1) 한 점과 방 내부의 작품들과 달리 밝은 색의 자신의 그림(사진 2)이 걸려 있습니다.

(좌/사진 1) 테이트현대비술관 로스코 방 밖의 모네, 수련 (우/사진 2) 테이트현대미술관 로스코 방 밖의 로스코 그림

 

(사진 3) 로스코 방 내부 전경


방에 들어서서 어두운 조명에 적응하고 나면 검붉은 색조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사진 3). 그는 시그램 연작 전시 장소에서 자신의 그림과 관람자 사이의 강한 교감을 위해 관람객이 어둡고 조용한 우주에 들어서 경이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는 "... 비극, 황홀경, 몰락 등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대형 그림들을 어떤 거리에서 보는 게 좋은가라는 질문에 40센티미터 정도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관람자가 그림에 완전히 몰입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지요.

로스코 방은 관람자를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시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방에서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상 모습은 로스코 방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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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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