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조율사 [한만수]
피아노 조율사
2021.12.20
초등학교 동창 막내딸이 시집가는 날이었습니다. 요즘은 청첩장도 카톡으로 보내는 것이 유행입니다. 코로나19로 축의금을 보낼 은행 계좌번호까지 보냈습니다. 코로나12 때문에 오지 않아도 이해를 한다는 뜻이 숨겨져 있는 온라인 청첩장이었습니다.
저는 예식장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참석을 하기로 했습다. 예식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와 냇가와 연결이 되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12월이면 단풍을 떨어낸 나무들이 알몸으로 서 있어야 하는데 산은 아직 늦가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산골 소읍인데도 예전처럼 목줄이 없는 개와 산책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같이 목끈을 쥐고 산책하는 풍경이 좀 낯설어 보였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고향에 있는 친구들 몇몇만 예식장에 올 줄 알았습니다. 예상 외로 서울이며, 부산 등지에서 많은 동창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아는 얼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보니 낯선 얼굴이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왔다는 그 동창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물었습니다. 익살이 있는 동창이 그 동창을 데리고 다니면서 “야, 이름이 뭔지 아냐?” 하며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 동창은 거의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온 동창을 너무 민망하게 만드는 모습이 보기가 안 좋아서 슬그머니 뒷걸음을 쳤습니다. 소파에 가서 앉으려고 하는데 그 동창이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딴 사람은 아무도 몰라도, 야 이름은 알겠구먼. 너. 만수지! 한만수.”
30여 명의 동창들 중에 저 혼자만 기억하고 있다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동창이 제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이해가 됐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얼굴형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동창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동네에 살았었는지, 6학년 때는 몇 반이었는지 기억이 깜깜했습니다.
“나야, 나! 양성모.”
“아! 니가 성모냐? 서울에서 같은 택시를 타도 몰라봤겠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껴안았습니다. 성모도 저처럼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5학년 때 겨울 성모와 만화책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간 저는 만화책을 보자기에 쌌습니다.
“눈이 많이 올 거 같응께, 냘 학교에 갖고 가서 바꿔 봐라.”
바쁘게 집을 나서는 어머니가 말렸지만 만화책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 컸습니다. 성모가 사는 동네는 10리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만화책을 빌려서 집으로 오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성모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동네에서 가요콩쿠르를 했습니다. 성모가 가요콩쿠르 무대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통기타를 샀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손가락이 불어 터지도록 배웠으나 시나브로 흥미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때 보고 거의 50년 만에 만난 것입니다.
그 동창은 농사를 지으면 평생 고생만 할 것 같아서 가출을 했다고 했습니다. 우연히 피아노 조율사 밑에서 조수로 일을 하게 됐는데, 음악적 재질이 있어서 군대 전역 후에는 독립을 했다는 겁니다.
“아들 녀석 둘 있는데, 둘 다 아파트 한 채씩 하고, 피아노 가게 하나씩 내 줬다. 내 의무는 끝난 거지 뭐.”
가요콩쿠르 대회 무대에서 기타를 치던, 농사는 희망이 없다며 쌀 두 말을 몰래 팔아 가출을 했다는, 50년 만에 만났어도 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양성모의 입에서는 꿈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양성모라는 거울을 통해 제 과거가 보이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뷔페에서 자연스럽게 합석을 했습니다.
“너, 작가 됐다며?”
“누가 그라는데?”
“서울서 내려오면서 만수 뭐하냐고 물었더니 친구들이 그러더라.”
“작가는 뭐…”
“나는 너 작가가 될 줄 알았다. 너, 초등학교 6학년 때 소설 썼던 거 생각 나냐?”
놀랍게도 그 동창은 제가 6학년 때 소설이라고 흉내 낸 글의 제목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 혼자만 알고 있던 내밀스러운 비밀을 들켜 버린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술 몇 잔이 들어간 성모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을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공한 다음에 참석하려고 했지…”
제가 볼 때 성모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동창은 마르게 웃었습니다. 자식들 모두 분가시키고 작은 건물도 하나 있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동창들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사고 싶어도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만약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겠다. 죽을 때 내가 재산을 갖고 가는 것도 아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빚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여행도 좀 다니며 살겠다....
“난, 만수 니가 부럽다.”
동창이 내 손을 잡았습니다. 저는 “나도 네가 부럽다.”라는 말이 내 입에서 저절로 튀어 나와서 맥없이 웃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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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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