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노동법제 개혁해야...근로시간계좌제 도입 [한국경제연구원] ㅣ 독일의 '근로시간 저축 계좌' 제도
바쁠 때 집중근무, 원할 때 자유롭게 쉬는 근로시간계좌제 도입해야
[권혁 교수,‘노동관계 법제도 선진화를 위한 정책과제’보고서]
임금체계 복잡성으로 법적 갈등 반복, 노사 합의에 기반한 근로계약법제로
고령자에 대한 파견규제 완화 등 고령 일자리 규제샌드박스 도입
대체근로금지, 부당노동행위 등 집단적노사관계법 글로벌스탠다드에 맞춰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노동법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획일적이고 경직적인 노동법 규제는 과거 대공장 대량생산 방식에 최적화된 것이나, 오늘날 정보통신산업환경 등 산업대전환의 시대에는 노동법 규제의 다원화를 통해 규범과 현실의 괴리를 좁혀야 한다. 특히 근로시간의 획일적 규율방식에서 벗어나 유연한 규율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경제연구원(원장 권태신, 이하 한경연)으로부터 연구 의뢰받은 『노동관계 법제도 선진화를 위한 정책과제』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위의 사례는 근로시간 계좌를 은행 예금계좌처럼 운영하는 독일의 이야기다. 재택근무, 원격근무 등 근로 형태가 다양해지고, 근로자도 자유롭게 출퇴근 시간을 결정하는 등 근로의 자율성 확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의 노동법은 근로시간에 관해 경직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이 같은 수요에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다. 보고서는 근로자와 사용자가 근로시간을 협의하는 방식인 독일의 근로시간계좌제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근로시간계좌제란 업무량이 많을 때 초과근무를 하면 초과시간을 저축해두고 일이 적을 때 휴가 등으로 소진하는 제도다.
독일의 경우 단체협약을 통해 근로시간계좌제가 채택되면 근로자는 근로시간을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근로시간계좌제의 유형으로는 정산기간이 월 또는 년 단위로 설정된 단기근로시간계좌와 단위 기간이 1년 이상인 장기근로시간계좌가 있다. 장기근로시간계좌에 저축된 시간은 육아, 양육, 재교육, 안식년 및 유급조기퇴직 등을 위해서 이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시간계좌로 설정되지만 금전계좌(임금청구권 형태로 환산)로도 운영이 가능하다.
실제 독일 운영현황을 보면, 250인 이상 사업자의 경우 장기 근로시간계좌를 활용하고 있는 사업장의 비중이 ‘16년 기준 약 81%에 달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
권 교수는 “독일의 경우 근로시간계좌제에 관한 단체협약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강조하며 “근로시간 생애주기를 염두에 두고 근로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질병 치료, 교육이나 훈련을 위해 장기간 휴식 시간 확보 등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로시간계좌제는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모델로 적합하다”고 밝혔다.
노사 간 합의 존중하는 근로계약 통해 임금체계 개편 필요
현행 근로기준법은 단순 직공 중심의 근로자상을 전제로, 근로시간의 양에 비례한 임금체계를 고수하고 있으나, 오늘날 창의적 노동시대에는 근로의 질과 성과가 근로시간의 양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근로시간의 양이 아닌 성과 중심 임금체계로의 개편이 필요하다. 나아가 근로기준법은 야간, 휴일근로 등 가산임금에 대해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 산정도구로서 평균임금*, 통상임금* 등의 개념이 매우 불명확하고 복잡해 노사 간에 불필요한 소모적 분쟁이 반복되고 있다.
보고서에서는 가산임금 대상 범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노사 간 합의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노사가 가산임금 산입대상금품, 가산할증율 등을 합의로 정해 두면 이러한 합의를 존중함으로써, 통상임금 등의 산입범위를 둘러싼 모호성과 그에 따라 초래되는 분쟁은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권 교수는 “구체적인 임금의 결정은 노사 합의로 도출하도록 하면서 가산임금이나 임금 산출 방식에 있어 산업환경 변화에 따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강조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근로시간에 비례한 성과체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를 보편화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령자에 대한 파견규제 완화 등 규제샌드박스 도입
보고서는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고령자에 대한 노동법적 규제 완화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고령자 고용정책은, 고용안정이라는 관점보다는 일하는 기회의 제공 그 자체가 더 큰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일하고자 하는 고령자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중요한 과제로 평가하였다.
나아가 비정규직 관련 법령에서 고령자 고용의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현행 파견법령은 경비, 운전 등 32개 업무에만 파견을 허용하고 실제 파견이 필요한 제조업은 금지하고 있는데, 해당 업무에 풍부한 경험이 있으나, 나이 때문에 재취업이 사실상 어려운 고령자에 한해 파견근로에 관한 규제를 완화해주는 것이다. 부족한 임금 등에 대해서는 노령연금이나 임금보전 등을 통한 고령 근로자의 사회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이 효과적인 고령자 고용대책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권 교수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어긋나는 사용자의 대체근로금지제도와 부당노동행위제도 등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대체근로를 위한 기간제 근로자나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만, 도급이나 신규채용의 방식으로 대체근로를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고 보았다. 나아가 직장점거방식의 쟁의행위는, 사용자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파업에 참여하지 아니하는 근로자의 근로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당노동행위 위반으로 형벌로서 징역형을 부과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 이라며, 부당노동행위 그 자체에 대한 제재가 아니라 부당노동행위 구제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제재를 하는 등 원상회복을 지향하고 나아가 제재 수단도 형벌이 아닌 경제벌이나 행정벌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추광호 한경연 경제정책실장은 “미래의 노동법은 획일적이고 경직적인 근로기준법 체계에서 벗어나 업종과 업무수행방식 등을 고려한 노사 간 자율을 존중하는 근로계약법 체제로 재편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근로하는 노무 제공자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더 많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노동법 업그레이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경연
독일 '근로시간 저축 계좌' 제도
돈 벌고 싶으면 주 40시간, 쉬고 싶으면 28시간… 獨, 유연근무 실험
정부는 법정 근로시간만 정하고 세부사항은 노사 자율협상 보장
독일 베를린에서 자동차 업체 판매원으로 일하는 우도 슈타인마이어씨는 지난해 9월 가족과 함께 한 달간 이탈리아로 휴가를 다녀왔다.
원래 휴가는 20일이지만 자신의 '근로 시간 저축 계좌'에서 열흘의 휴가를 꺼내쓴 것이다. 1~8월 동안 초과 근무가 많았던 덕분이다. 슈타인마이어씨는 "하루 8시간을 초과한 근무시간을 저축 계좌에 적립하는데, 8시간이 되면 휴가 일수가 하루 늘어난다"면서 "사용 기한은 회사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년이며 노사 합의에 따라 기한이 아예 없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독일 전체 기업의 44%, 대기업의 89%가 노사 합의에 의해 이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초과 근로를 임금이 아닌 휴가로 보상하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는 독일의 유연한 노동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성장이 정체되며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다시 발돋움한 비결로 정부 개입보다는 노사의 자율 협상을 최대한 보장하는 정책을 꼽는다. 정부는 법정 근로시간(기준시간 주당 40시간)만 정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기업과 근로자의 자율적인 협상에 맡기면서 지역·업종·기업별 특성에 적합한 근로시간 모델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독일 노동 경쟁력은 연방 정부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정책이 오히려 부족했던 결과"라며 "독일은 임금 협상, 근로시간 조정 등을 노조와 기업이 만나 직접 결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독일 기업과 노조는 이런 자율성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근로방식을 시험하고 있다. 벤츠·보쉬 등 글로벌 기업의 근거지인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지난달 선택적 주28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앞으로 이 지역 근로자 중 원하는 사람은 2년간 주 28시간 근무를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자녀 육아나 자기 계발을 위해 근로시간을 줄이는 사람들은 임금도 이에 비례해 줄어든다. 반면 돈을 더 벌기를 원하는 근로자는 지금처럼 최대 40시간까지 그대로 근무할 수도 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기준을 근로자 스스로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김강한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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