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가깝고도 먼 '그대' [정달호]
와인, 가깝고도 먼 '그대'
2021.12.06
지난 11월 초순 대전에서 개최된 아시아와인트로피(2021 Asia Wine Trophy, Nov. 8~11, 2021)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단순 행사 참관이 아니라 국제 와인품평회 심사위원(juror)으로 참가한 것입니다. 와인과 관련한 전문적인 경력이나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니 좀 이상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와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그렇게 이끌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행사 기획사의 어떤 분을 제주에서 만나던 중 와인 이야기가 나와 대전에 그런 행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꽤 오랫동안 와인을 마셔왔고 여전히 와인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알고 그분이 저를 공동주최 기관인 대전마케팅공사와 독일와인마케팅공사에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국제 와인품평 기관에서도 외교관 출신의 홍보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는지, 저의 긴 와인 경력을 수용해서 심사위원으로 선정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20대 후반 영국에 일 년여 체류할 때부터 와인을 알고 이따금 마셔왔으니 근 40년이 넘는 기간 와인과 가까이 지내온 셈이지요.
거기에 더해, 제가 수년 전에 와인 매니아 친구가 쓴 와인 책(김좌년의 와인 오디세이: 문화를 음미하다, 초이스북)에 추천사를 써준 일을 일종의 자격(?)으로 인정해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이 친구와 함께 좋은 와인들을 마시면서 와인에 대한 지식을 더욱 넓히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행사에 관심을 보인 것도 와인의 세계(Wine World)를 더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와인에 발을 들여놓으면 어느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닌 게 아니라 오디세이를 하는 기분으로 그 세계를 탐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와인은 늘 가까이에 있지만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 길을 가야 하나 봅니다.
애주가들은 모든 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주종을 가리지 않고 좋은 술은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와인 이외의 술은 어느 정도 마시면 호불호가 쉽게 정해져 선택도 비교적 용이합니다. 와인의 경우는, 포도재배에 적합한 곳이면 세계 어디서나 제조할 수 있어 그만큼 와인의 종류가 많고 따라서 선택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습니다. 와인에 대한 선호도 마시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다양할 수밖에 없고 또 품질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므로 고급 와인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와인에의 길이 가깝고도 먼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2013년에 시작하여 9년째에 접어든 대전 아시아와인트로피는 세계와인기구(OIV, Organization Internationale de Vigne et de Vin)가 인정하는 아시아 유일의 국제 와인품평 행사입니다. 대전에서는 이 시기에 와인트로피 행사와 나란히 국제와인페스티벌과 국제와인콘퍼런스를 개최함으로써 와인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접근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와인 분야에서도 이처럼 높은 수준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독일의 베를린와인트로피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이번 대전와인트로피 행사에는 약 80명의 내외 와인 전문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출품된 와인 3,200여 병을 시음하고 품평하였습니다. 와인을 품평하는 것은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 어느 전문가의 현장 고백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와인 품평이 쉽지 않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들 전문가들의 직업을 보면 소믈리에, 와인판매상과 수입상 대표, 와인생산자 조합 대표, 와인 관련 전문교수 등입니다.
이들은 16개 팀으로 나뉘어 팀당 5명이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1회(플라이트, flight)에 15~18병씩, 하루 3, 4회 처리하여 4일간 계속하였으니 각 심사위원은 4일간 총 200병 이상의 와인을 마시고 품평을 한 셈입니다. 단순히 병 수로 보면 대단한 양입니다. 와인 애호가라도 몇 년을 마셔야 그만한 수의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와인을 마셔서 목으로 넘기지는 않고 입속에서 평가만 하고 내뱉지만 저의 경우는 그래도 조금씩 목구멍을 넘어가는 와인은 어쩔 수가 없어 한나절 품평을 마치면 약간의 취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답니다. 좋은 레드/화이트 와인과 환상적인 스파클링 와인들을 맛보고 그대로 뱉어내야 하는 아쉬움 또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와인 품평은 많은 와인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큰 즐거움이었지만 그 많은 와인을 입속에 넣고 마시지는 않으면서 정해진 시간 내에 분야별로 점수를 내고 총점을 매겨야 하는 노동이기도 하였습니다.
와인 품평을 할 때도 일상에서 와인을 마실 때처럼 세 가지 항목을 위주로 봅니다. 첫째 빛깔(Color/Robe), 둘째 향(Smell/Bouquet), 셋째 맛(Taste/Saveur)을 보는데 항목별로 각각 몇 개의 세부 요소들로 나눠서 점수를 냅니다. 그러고 나서 추가적으로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Balance, Harmony)를 봅니다. 와인을 마시면서 ‘'이거 참 좋다'', ''아주 괜찮은 와인이다'’라는 말을 할 때도 앞의 세 가지 항목과 함께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도대체 와인이 뭐길래 이런 대단한 지위를 누리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합니다.
모르긴 해도 와인의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와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의 종류가 수천 종이나 되며 포도의 품종에 따라 와인의 맛이 다 다르고 재배지의 기후와 풍토에 따라 또 맛이 달라집니다. 으깬 포도의 즙이 커다란 통 속에서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통해 와인으로 만들어집니다. 와인은 병 속에 들어가서도 적절한 햇수를 거치면서 향과 맛이 더욱 좋아집니다. 이 과정에서 각 양조장(Winery, Chateau, Domaine 등)의 제조 기술이 또한 와인의 품질을 높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세계적으로 수천 종의 와인 품종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가 마시는 와인의 품종은 많아야 50종을 넘지 않고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품종은 여남은 가지 정도입니다. 예컨대 레드와인 품종으로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원료인 까베르네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Merlot) 및 부르고뉴 와인을 빚는 피노누아르((Pinot Noir), 이태리의 산지오베제(Sangiovese)와 네비올로(Nebbiolo), 스페인의 템프라뇨(Tempranillo), 호주의 시라즈(Shiraz), 미국의 진판델(Zinfandel), 아르헨티나의 말벡(Malbec), 칠레의 카르메네르(Carmenere)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화이트와인의 대표 품종으로는 세계 각지에서 재배되는 샤르도네(Chardonay), 독일의 리슬링(Riesling),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많이 재배되는 소비뇽블랑(Sauvignon Blanc) 등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레드와인은 여러 가지 품종을 섞어서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더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만들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번 대전 품평회에서는 평소 생각지 못하던 품종 혼합이 시도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와인 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와인의 소비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생활수준이 높아진 데 따른 소비자들의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화에 따라 서양의 식생활 문화가 도입되면서 와인도 자연스럽게 우리 식생활에 들어와 특히 외식 문화의 주요 일부가 됨으로써 소비가 빠르게 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와인 수입상도 많고 와인 숍과 와인 바, 그리고 지역마다 와인 동호회도 많습니다. 좀 지나치다 싶은 면도 있지만 소비의 고급화가 그런 추세를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와인은 많이 마시다 보면 자연히 취향에 따른 각자의 선호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번에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품평회와 부대 행사에서 그야말로 다양한 지역의 와인,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마셔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유명 산지인 유럽 몇몇 나라와 미국, 호주, 뉴질랜드, 칠레, 아르헨티나, 남아공 외에도 그리스, 오스트리아, 몰도바, 그루지아에서도 좋은 와인이 생산됩니다. 이런 지역에서 나오는 것 중 가격 대비 우수한 와인이 적지 않으므로 때때로 과감한 선택을 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와인 얘기를 하다 보니 와인만 괜찮은 술이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와인 외에도 좋은 술이 많습니다. 시장에 가서 주류 코너를 둘러보면 세상이 온통 애주가의 것인 양 다양한 맛과 질의 술이 넘쳐납니다. 수입 맥주가 우리 맥주 시장을 풍미하듯 와인이 또한 우리 주류시장에서 귀족 행세를 하는 상황에서 우리 전통 술의 소비가 줄어들까 하는 걱정이 있지만 우리 전통주도 점차 고품질 고품격으로 진화하면서 외국산 주류와의 경쟁에서 당당히 맞서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통상 술이 음식과 어우러져 가는 것임을 고려하면 우리 전통음식이 주가 되는 대중적 식문화가 유지되는 한 우리 전통주의 장래도 어둡지 않다고 봅니다. 와인은 애주가와 미식가들이 찾는 술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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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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