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의 <리어왕>―백전노장의 힘 [권오숙]
이순재의 <리어왕>―백전노장의 힘
2021.11.24
11월 만추의 계절에 대한민국 연극계가 들썩였습니다. 바로 백전노장 이순재 배우의 <리어왕> 공연 때문이었습니다. 티켓을 오픈 하자마자 예매율 1위를 차지하며 관심을 끌어모으더니 급기야 전석 매진에 이어 연장 공연이 결정되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으로 다른 공연장들은 관객 모객에 무진 애를 먹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상황입니다. 셰익스피어 학자인 필자는 흥이 나기도 하면서 한편 의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이현우 교수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데다 3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을 보고 정통극으로 연출되리라는 것은 짐작했습니다. 워낙 학자들은 전문 연출가들과 달리 원작에서 쉽게 자유롭지 못한 법이니까요. 그런데 공연은 예상보다도 더 원작에 충실해서 어떤 관객은 ‘레트로풍’이라고 관람 리뷰를 남겼습니다. 새로운 시도가 없이 고전적으로 연출되었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런 연출은 예상했지만 이순재 배우에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88세의 노령에 연기 인생 65년을 기념하여 대작에 도전하는 배우를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5년 전 이순재 씨가 연기 인생 60년을 기념하여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 역을 열연했던 때가 기억났습니다. 리어왕만큼은 아니더라도 윌리 로먼 역도 극 속 비중이 전체 극의 7~8할 정도를 차지합니다. 당시 80이 넘은 노배우의 격정적인 연기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 대해 마음 한구석에 한 가지 우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배우의 기력이 여전할까? 3시간이 넘는 긴 공연 시간 동안 배은망덕한 딸들에게 느끼는 질풍노도 같은 분노와 배신감을 연기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우려들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그런 우려는 공연장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순재 씨의 연기는 너무 절제되어 있었고, 리어왕의 처절한 맘속 폭풍우는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리어왕> 공연을 볼 때마다 리어왕의 격정과 압도적 피날레가 불러일으켰던 카타르시스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공연에서는 제자들과 단체 관람을 한 뒤 울어서 붉어진 눈이 부끄러워 그냥 해산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습니다.
원래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비극들 중에서도 감정의 격렬함이나 비극미가 가장 강한 극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게다가 배신감으로 인해 점점 정신을 잃어가는 리어왕의 광기 장면이나 미친 거지로 변장한 인물의 횡설수설, 그리고 눈알을 뽑는 잔인한 장면 등 무대에서 연출하기 까다로운 요소들도 많은 편입니다. 셰익스피어 극 중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쉬운 극이 있겠냐마는 <리어왕>은 유독 어려운 극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이번 공연은 이런 까다로운 장면 처리도 대체로 아쉬웠습니다. 이연희가 막내딸 코딜리아 역과 함께 1인 2역을 한 광대역도 리어왕의 어리석음과 세태를 풍자하는 비유적 대사가 거의 전달되지 않았고 노래들은 너무 밋밋했습니다. 날카로운 풍자로 지혜를 일깨우고 신랄한 노래로 웃음을 유발하는 제 기능을 소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순재 씨가 기자 간담회에서 “셰익스피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언어 구사”라며, “문학적인 수사가 많기 때문에 배우가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관객에게 극이 전달되지 않는다”고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공연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배우들의 대사 실수도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순재 씨의 리어왕 역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금요일 낮 공연이었고, 저녁 시간에 또 한 차례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녁 공연을 위해 에너지를 아끼느라 혼신의 노력을 다하지 않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그렇게 많이 몰린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이순재를 비롯하여, 소유진, 이연희 등 스타성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탓인가? 그래서 관람 평을 찾아보았습니다. 인터파크 7.3점, 예스24 7.9점. 그리 후한 점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관람 평들 중에 “믿고 보는 이순재”, “이순재 선생님의 열정과 투혼이 감명 깊었다”, “이순재 선생님이 원캐로 200분가량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예매했다”, “이순재의 리어왕...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팔순 노배우가 그려낼 리어왕 모습에 설레었다” 등 이순재 배우에 대한 기대와 찬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역시 백전노장의 힘이었습니다.
관객들은 그의 연기를 떠나 그 나이에도 변함없이 무대에 오르고, 그 긴 대사를 외워 소화하는 투혼에 박수를 보내고 응원을 한 것입니다. 거의 한 달 동안 매일, 어떤 날은 두 번씩 그 긴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연기를 해내는 노배우에게 존경을 보내는 것입니다. 필자도 이순재 씨에게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에 다소 실망한 면도 있지만, 그의 연기 투혼과 무대 사랑에 대해서는 무한한 경외감을 느낍니다.
아무튼 이 가을, 대배우 덕분에 국내 연극계에 한 차례 셰익스피어 바람이 불었습니다. 지난 2009년에는 고(故) 오현경 씨가 연극 인생 60주년을 맞아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역을 공연한 바 있습니다. 이런 공연들은 우리나라 연극인들에게도 셰익스피어가 기념비적인 작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괜히 필자의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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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권오숙
한국외대에서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국외대, 서울과학기술대 외래교수,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연구이사. 주요 저서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다』 『청소년을 위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와 후기 구조주의』,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등. 『햄릿』, 『맥베스』,『리어 왕』,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 『살로메』 등 역서 다수.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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