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맛 ‘미스김라일락’ [노경아]

 

 

첫사랑의 맛 ‘미스김라일락’ [노경아]

첫사랑의 맛 ‘미스김라일락’
2022.05.18

봄의 끝자락에 ‘미스김라일락’이 가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햇살 따뜻한 곳에 연보랏빛 미스김라일락 꽃이 구름처럼 피어 있습니다. 이맘때면 야근하는 날이 행복합니다. 한밤중 라일락 향기로 물든 ‘서울로 7017’을 걷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밤이 되면 라일락 꽃향기가 더 짙어지거든요. 캔 맥주 하나 사 들고 벤치에 앉아 홀짝대다 보면 고급스러운 향에 빠져들어 절로 흥얼거리게 됩니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 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 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휙~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면 아주 잠깐 현기증이 느껴지는데, 술에 취한 건지 꽃향에 취한 건지 매번 헷갈립니다. 미스김라일락은 우리 토종 라일락인 수수꽃다리보다 향기가 두 배는 더 짙은 듯합니다. 생명력도 강해 수수꽃다리는 꽃이 다 졌는데, 미스김은 한동안 더 향기를 뿜어내며 생글생글 웃을 것 같습니다.

수수꽃다리는 잡곡 수수에 피는 꽃에 ‘다리’를 붙인 이름으로, 수수 이삭처럼 꽃이 한데 뭉쳐 탐스럽게 핀 모습에서 유래했습니다. ‘수수꽃이 달리는 나무’를 줄인, 참 예쁜 이름입니다.

 

 


반면에 미스김라일락은 아쉬움이 드는 이름입니다. 1947년 미군정청 소속 식물채집가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가 북한산 바위틈에서 수수꽃다리 종자를 채취해 미국으로 가져간 뒤 품종을 개량한 것이 미스김라일락입니다. 당시 미더를 도왔던 여성의 성(姓)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그 ‘미스 김’은 학덕(學德)이 높은 여성이었을 겁니다. 70여 년 전 외국인을 도울 정도라면 영어든 우리말이든 소통이 원활한 사람이었을 테죠. 식물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고요. 그러니 ‘김선생라일락’ 혹은 ‘경아씨라일락’처럼 그녀의 이름을 넣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첫사랑의 맛이 궁금해? 라일락 잎을 깨물어 봐. 그럼 알 수 있어.” “진짜? … 꺄악~~아이 써. 퉤퉤! 이 나쁜 놈!” “그렇게 써? 거짓말한 거 아니야. 나도 어디선가 읽은 거야. 미안미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연인이 한바탕 귀여운 소란을 떨고 갑니다. 첫사랑의 맛이라고? 너무도 궁금해 잎을 따 살짝 깨물어봤습니다. 그녀가 욕을 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쓰디씁니다. 첫사랑이 잘 이뤄지지 않아 생긴 말이지 싶습니다. 쓰디쓴 맛에는 아련하고 슬프고 미련이 남은 첫사랑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겠지요.

‘첫사랑’ 하면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1973년)이 떠오릅니다. 금아 선생은 열일곱 살부터 마흔넷까지 27년 동안 아사코와의 세 차례 짧은 만남을 ‘인연’으로 풀어놓았습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에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글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운명의 벽에 부딪혀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이라면 억지로 만나 후회하는 것보단 ‘그리움의 응어리’로 남기는 게 더 아름답지 싶습니다.

 

 


각박한 일상에서 옛 인연(굳이 첫사랑이 아니라도)을 떠올리는 일은 잔잔한 기쁨입니다. 라일락 덕분에 오래전 기억들이 살아 움직이니, 오월은 생명의 계절이 맞습니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궁금해집니다. 부디 소중한 인연으로 기억되길 소망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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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 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 담당 연구원, 이투데이 교열팀장을 거쳐 현재 한국일보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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