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 그리고 민주주의[정달호]
전쟁과 여성, 그리고 민주주의
2022.05.06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 전쟁은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기록문학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 1948. 5. 31~)가 그의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한 말입니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의 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구소련 여성들과의 인터뷰 내용에 작가의 관찰을 보태서 엮은 것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구소련 각지를 편력하면서 가진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기술한 그의 작품은 전쟁의 실상에 관하여 여성의 시각으로 서술한 가장 현장감 있는 기록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 소련 여성 전투원들이 겪었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장면에서 여러 번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해 12월 이를 주제로 한 칼럼에서 저는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노벨평화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에 관해 이처럼 처절한 기록을 읽으면 사람들이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는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지구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평화가 증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속성을 떠올려보면 인류는 결코 영구적인 평화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란 암울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가장 풀기 어려운 인간사의 비밀'인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를 거스르고 70여 년 만에 바로 그 땅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당시 독일에 대항해 한 나라로 같은 편에서 싸웠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1991년 이래 다른 나라가 되어 지금 서로를 상대로 죽기살기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출신 알렉시예비치 여사는 이번 러시아의 대 우크라이나 침공 훨씬 전에 어쩌면 이런 비극을 어렴풋이라도 머릿속에 그려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토적, 종교적, 민족적으로 두 나라는 복잡미묘한 앙숙 관계인 데다, 전쟁이라는 가장 풀기 어려운 인간사의 수수께끼는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게 마련이니까요.
국제정치에서 힘을 중심으로 하는 현실론(power politics)을 신봉하는 저로서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서방측의 예단에 한동안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지금 시대에 무자비한 살상과 무차별적인 파괴를 수반하는 전쟁을 어찌 감행하겠는가, 하면서 말입니다. 결국 러시아는 설득력이 없는 해괴한 구실을 내세워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설마했던 전쟁이 드디어 현실이 되고 만 것이지요. 그것도 인간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민간인 학살을 서슴지 않는, 참혹하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비문명적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지만 유린된 국토와 망가진 그들의 삶은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이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알렉시예비치 여사의 절규에 가까운 진단을 바탕으로 만일 러시아의 지도자와 핵심 보좌진에 여성이 다수를 점했더라도 그들이 이런 침략전쟁을 일으켰을까, 라는 가상의 질문을 중심으로 전쟁과 여성의 문제를 천착해보고자 합니다. 나아가 러시아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양국 간의 분쟁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하는 문제도 함께 짚어보려고 합니다.
어쩌다 예외가 있을 수 있다고 쳐도, 자고로 전쟁은 남성들이 일으키고 남성들이 주로 싸웠던 인간사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작가의 말을 원용하면 전쟁은 항상 남성의 얼굴을 한 것입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여성 군주가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세계화가 일상이 된 현대에 전쟁은 범죄시되고 죄악시되고 있습니다. 시대를 관통하여 지구촌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늘 있어왔지만 전쟁은 거의 다 남성들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포클랜드 전쟁처럼 여성인 대처 영국 총리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은 자국의 해외 영토를 방위하기 위한 것이었지 침략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여성도 서로 또는 남성을 상대로 싸우기도 하고 때로 치명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존재는 전쟁이라는 조직적인 대규모 폭력과는 잘 맞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성이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일에 스스럼없이 나선다는 것은 선뜻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재래식 전쟁에서 일선 병사들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은 항상 여성이며 여성에 의존하는 어린 생명들입니다. 고대부터 여성은 전쟁에서 상대측 남성 병사들에게는 '전리품'으로 탈취당하거나 유린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단정할 수는 없어도 여성 지도자가 자신이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 참혹한 전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고금의 전쟁에서 그런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푸틴이라는 남성 독재자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이런 엄청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일단 전쟁이 나면 여성도 직간접으로 전쟁에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과 나라를 지키는 데 남녀가 다를 수는 없으니까요. 구소련의 대독 전선에 동원된 소련 여성의 수는 15만에 달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15~18세의 소녀들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대러시아 항전에서도 많은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용감하게 나서고 있습니다. 전쟁의 경과를 보면 밀고 밀리는 와중에 더 처참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여성들입니다. 전쟁은 남성들이 일으키고 피해는 여성들이 더 깊이 입게 되는 양상입니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남성들은 주로 독재자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기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민주사회라면 평화롭고 안정되고 안전한 삶을 소망하는 구성원의 뜻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독재자가 이끄는 권위주의 정권은 가부장적 성격을 띠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들은 보수적인 여성관에 입각하여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사회 참여를 인정하지 않으며 여성의 기본적 인권마저 탄압합니다.
푸틴과 시진핑의 독재 권력 강화를 필두로 지금 세계 각지에서는 권위주의가 확산되고 민주주의가 약화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평화는 점점 더 지탱하기 어렵고 도처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위협에 시달립니다. 언론의 자유도 말살되거나 억제됩니다. 북한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하여 터키, 동유럽, 중남미와 중동, 아프리카에서도 권력의 독재화 현상이 점점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는 이런 나라들에서는 내부적으로도 폭력이 지배하고 이웃과는 전쟁의 위협이 상존합니다.
반대로 북구나 서구 또는 북미처럼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더 잘 보장된 사회일수록 정치가 더 민주화되고 경제도 더 발전합니다. 어느 사회든 인구의 절반이 여성인데 남성에 뒤지지 않는 재능과 실력과 열정을 가진 여성들이 활발히 참여하지 않고는 그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이슬람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자기 실현을 억압하고, 사회적으로 또 가정적으로 여성을 학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사회 구성원 절반이 다른 절반과 동등하고 형평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민주적 가치에 반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에서 남성 가장이 여성의 목소리를 강압적으로 억누른다면 민주적인 가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비민주적이면 사회도 민주적으로 운영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진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본다면 역사의 발전은 여성의 지위와 권리의 향상과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녀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권리가 평등하고, 양성 간 형평이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대내적으로 갈등도 적을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되도록 전쟁을 피하고자 할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남이든 여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며 남녀는 타고난 신체적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남녀가 균등한 기회를 누리면서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나가는 사회가 진정으로 바람직한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그런 사회가 되어 전쟁이 더 이상 '가장 풀기 어려운 인간사의 비밀'이 아니기를 기대해봅니다. 아울러, 민주주의의 단합된 힘으로, 무모한 독재자가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항전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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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 뉴욕대(NYU) 석사,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거쳤다. 외교관으로 시작해 주 파나마, 주 이집트대사를 역임하고, 2010년부터 제주로 내려와 유엔 관련된 일을 하다가 2015년 초부터, 월드컬처오픈(WCO) 부회장, 서울국제음악제(SIMF) 조직위원 등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꽃나무와 텃밭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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