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에 만난 꽃말 [노경아]

 

 

사월에 만난 꽃말 [노경아

사월에 만난 꽃말
2022.04.15

‘서러운’ 사월입니다. 4·3 제주 항쟁, 4·19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으로 귀한 생명을 수없이 잃은 달입니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찔레꽃 향기는/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목 놓아 울었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소리꾼 장사익이 목 놓아 부르던 ‘찔레꽃’의 처량한 노랫가락이 귓가에 맴돕니다. 햇살과 바람과 비가 생명을 깨워 꽃을 피워내는 이 좋은 계절에 가족을 잃은 이들은 문득문득 슬픔에 빠지곤 합니다.

‘잔인한’ 사월입니다. 100년 전 영국의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888~1965)은 433행이나 되는 긴 시 ‘황무지’를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사월은 왜 잔인한 시간이었을까요. 평론가들의 해석을 살펴봤습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황무지’를 현대 문명의 황폐함을 풍자한 시로 읽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이후 정신적 공허감을 상징적으로 그렸다고 주장합니다. 솔직히 너무 거창하고 복잡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황무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실을 노래한 시”라는 제임스 밀러 미국 시카고 대학 영문학 교수의 말에 관심이 갑니다. 사월에 엘리엇의 애인이 죽었기 때문이랍니다. 그의 연인이 여자였든 남자였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현대 문명의 폐해니 뭐니 하는 그런 이유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감성 풍부한 청년 엘리엇이 되어 봅니다.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이 자라나는(황무지 중)’ 사월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와 함께 저세상으로 가진 않았지만 엘리엇 또한 마음속으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다시 사월은 시작되고…. 사랑하는 사람만 빼고 온 세상은 생명의 향기로 되살아납니다. 사월이 참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가슴 시린’ 사월입니다. 사월에 아버지가 머나먼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지난해 같은 날 큰오빠도 그곳으로 갔습니다. 지난 주말 아버지 25주기, 큰오빠 1주기를 맞아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산소가 있는 충북 괴산으로 나서는데 새벽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이건만 왠지 서러워 명치끝이 아렸습니다. 박용래 시인이 봄에 내리는 비를 ‘서서 운다’고 표현할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박용래, ‘그 봄비’)

찬란하게 빛나는 산벚꽃이 눈부셔 사남매는 모여서 울었습니다. 분명 다섯을 낳아 키웠는데 하나가 빈다며 엄마도 울었습니다. “왜 늙은 아내가 아닌 젊은 아들을 데려갔어”라며 한탄도 쏟아냅니다. 노인의 눈물과 한탄이 안쓰러운지 할미꽃들도 한데 모여 얼굴이 벌게지도록 울었습니다.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괴산의 한 농원에서 만난 ‘꽃기린’의 꽃말입니다. 꽃기린은 가늘고 길게 뻗은 가지가 기린의 목을 닮아 붙은 다육식물의 이름입니다. 꽃말이 가슴속에 들어와 그 화분 앞에 한동안 멈춰 서 있었습니다. 온몸에 돋아난 억센 가시들에서 고난의 깊이를 속속들이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 순간 누웠던 나의 감정들이 '서서 우는' 봄비를 맞아 벌떡 일어섰습니다.

 

 



슬픔은 아주 깊숙이 간직해 두고 좋은 기억들만 자주 꺼내렵니다. 어느 해 봄밤 오남매가 모여 앉아 아버지가 사오신 생과자 먹던 기억을 꺼내니 웃음이 절로 납니다. 죽음도 이별도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내년 사월이면 또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이 슬픔이 되살아날지 모르지만.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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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 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 담당 연구원, 이투데이 교열팀장을 거쳐 현재 한국일보 교열팀장.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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