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브라이트 타계에 생각나는 일 [김수종]

 

올브라이트 타계에 생각나는 일 [김수종]


올브라이트 타계에 생각나는 일
2022.04.07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사람의 부음이 나올 때면 그 사람이 한창 이름을 날릴 때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영화배우 비비안 리의 경우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무하마드 알리의 죽음엔 소니 리스튼과의 세계 헤비급챔피언 복싱경기가 떠오르는 식으로 말입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달 23일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2000년 10월 그녀의 평양 방문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능라도 경기장의 10만 명 카드섹션 군중대회룰 참관했습니다. 김정일 옆에 선 그녀가 관중석에서 펼쳐지는 미사일 발사 카드섹션을 보며 놀라움과 당혹함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1993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취재하면서 경험한 소소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북한의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유엔 안보리가 연달아 열리고 미북 관계가 영변 폭격이냐 조약 복귀냐로 긴장일변도일 때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유엔 로비에서 미국 유엔 대표부 직원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기자냐"고 묻고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명함을 건네며 굉장히 살갑게 다가서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는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로 근무했고 부산 미국문화원에서 1년을 근무한 사람이었습니다. 차를 마시며 부산 살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먼발치에서도 나를 보고 생긋 웃으며 눈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당시 유엔본부 근처에 있는 미국 대표부는 미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던 장소였습니다. 어느 날 클린턴 정부의 주유엔 대표로 발탁되어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매들린 올브라이트 대사가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언론인들과 간담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기자 30여 명이 미국대표부 좁은 계단에 몰려들어 빌딩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대표부 공보담당 직원이 문 앞을 막고서는 "방이 작아 10명만 들어갈 수 있다"며 손을 들고 자기 매체 이름을 대며 아우성치는 기자들 중에서 참석자를 임의로 선정했습니다. 그 공보 직원은 부산 미국문화원에 근무했다며 나와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북새통에 언제 봤는지 맨 뒷줄에 섰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나를 손짓해 부르더니 "유 코리언 저널리스트?"라며 출입구를 통과하게 했고, 문 안으로 들어가는 내 어깨를 툭 쳤습니다. 마음속으로 "미국인들도 안면과 인연은 무시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해서 대사 집무실에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며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키에 풍성한 얼굴을 가진 그러나 야무진 아줌마 인상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 국무부는 남성 천국이었고 더군다나 체코 태생 여성이 유엔 대사가 됐다고 미국 언론이 떠들 때였습니다.

올브라이트 대사는 클린턴 대통령이 재선되자 바로 1997년 국무장관으로 발탁됐습니다. 그때까지 200여 년 동안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 하원의장에 이어 권력서열 4위인 국무장관은 백인 남성의 독무대였습니다. 게다가 세계의 경찰노릇을 밥먹듯이 하는 미국에서 국무장관은 대외 무력개입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여서 체코 유태인 가정 출신 여성이 그 자리를 꿰어 찼으니 미국 주류사회가 술렁일 만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유년시절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또 2차대전 이후는 공산주의 정치를 피해 피난했던 가족 이력으로 어릴 때부터 인권과 자유에 대한 의식이 싹텄고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면서 민주당 정부의 외교자문역을 맡아 활동하다 클린턴 대통령 정부에 합류했습니다.

올브라이트는 태생이 체코인이라 러시아 역사와 정치에 능통했으며 러시아어를 잘했다고 합니다. 그가 유엔대사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1990년대에 러시아는 정치적 격변기에 있었습니다. 옐친이 하야하고 KGB 출신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 대행이 되어 러시아에 독재 권력의 싹이 틀 때였습니다. 그녀는 2000년 국무장관으로 처음 푸틴과 마주 앉아 회담했습니다. 러시아의 미래를 탐색하는 중요한 회동이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한 달 전 뉴욕타임스에 푸틴의 우크라이나 책략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는데 그 글에 당시 회담할 때 느꼈던 푸틴의 첫인상을 "파충류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요즘 푸틴의 행동을 보면 그녀의 분석은 예리했습니다.

 

 



올브라이트는 국무장관  상원 인준 표결에서 '99대0'의 절대 지지를 받았습니다. 미국 외교는 초당적 대의를 중시해야 한다는 그녀의 소신에 공화당 의원들도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무장관이 되고 처음 했던 활동이 외국 여행이 아니라 텍사스 라이스대학에서 연설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미국 외교 정책을 미국 국민에게 바로 알려줘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녀는 외교정책은 초당적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내에서 알아먹지 못하고 지지받지 못하는 외교정책을 해외에서 추구할 수 없다."는 게 올브라이트의 외교 철학이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국력과 여건이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국민이 이해할 수 있고 초당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외교정책은 한국에도 필요한 게 아닐까요. 곧 출범할 윤석열 정부와 그때 야당이 20여 년 전 올브라이트가 주장했던 초당 외교의 중요성에 귀를 기울였으면 하고 생각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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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 매들린 코벨 올브라이트 Madeleine Korbel Albright (1937~2022)
미국의 여성 외교학자·정치인이다. 1997년~2001년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으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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