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점 사장이 되신 미술 선생님 [한만수]
가구점 사장이 되신 미술 선생님
2022.03.31
요즘 중고등학생들도 그렇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미술 시간은 거의 노는 시간이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은 칠판에 오늘 그림 주제를 써 놓는 것으로 수업 준비 끝입니다. 수업 시간 내내 그림을 못 그리는 학생의 스케치북에 구도를 잡아 주거나, 4B 연필로 대충 스케치를 해 주는 것으로 수업을 진행하십니다.
저는 은근히 미술 시간이 좋았습니다. 미술 시간을 좋아하는 만큼 나름대로 그림을 잘 그리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미술 시간이 아니더라도 노트에 틈틈이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한때는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칠판에 대뜸 동그라미 몇 개를 그리셨습니다. 집에서 광이나 창고 같은 데 문이 쉽게 열리지 않도록 자물쇠 고리에 걸어두는 스프링 형태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느냐?”
훗날 생각해 보니 그때는 5교시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점심시간에 신문 같은 곳에서 그 비슷한 그림을 보신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저나 급우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급우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학생들의 얼굴을 쭈욱 살피시더니 저를 찍으셨습니다.
“이게 무슨 그림 같냐?”
“제가 볼 때는 정신병자가 그린 것 같습니다.”
제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 천장이 떠나도록 웃음이 터졌습니다. 거의 동시에 선생님이 제 앞으로 달려오시더니 제 뺨을 왕복으로 몇 회나 갈겼습니다. 얼마나 뺨을 빨리 때렸는지 저는 피할 틈도 없었습니다.
“나가! 이 자식아! 복도에서 손들고 서 있어.”
일진이 지독하게 나빴던 저는 제 느낌을 거짓 없이 말씀드린 죄로 뺨을 맞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졸지에 천하의 몹쓸 학생이 되어서 복도로 쫓겨나가 두 손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수업은 다시 진행됐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의 그림이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가 그린 작품이라시며, 제가 손을 똑바로 들고 있는지 흘끔흘끔 저를 노려보셨습니다.
그 시절 선생님에게 이유 없이 뺨을 얻어맞거나, 군대식으로 엎드려뻗쳐를 해서 회초리로 엉덩이를 맞거나,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맞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분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시험을 봐서 점수가 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기다리던 미술 시간에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 은근히 기대하던 중에 그림은커녕,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얻어터지고 벌을 받고 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손을 들고 있는 팔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나 될 무렵 선생님은 화가 풀어지셨는지, 저를 부르셨습니다. 앞으로 말조심하라시며, 다시 군밤을 몇 대 때리시는 대로 얻어맞고 제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 뒤부터 그림 그리는 것은 여전히 좋아했지만, 미술 선생님을 보면 슬슬 피하거나,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사표를 내셨습니다. 그 시절에는 선생님들이 학교에 사표를 내는 일이 흔했습니다. 막상 선생님이 사표를 내고 서울에서 무슨 가구점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니까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좀 보고 싶기도 하고, 가구점으로 돈은 많이 버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3학년 초에 급우들 몇몇이 서울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서울에 가서 볼일을 보고 나서도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친구 한 명이 가구점을 하는 미술 선생님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미술 선생님의 가구점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아현동에 사는 이모 집에 가다가 미술 선생님을 봤다는 것입니다.
“정말 미술 선생님이 맞냐?”
“틀림없다니까, 허리 꾸부정한 거 하며, 안경 쓴 것도 똑같아.”
“그럼, 왜 안 만나 봤냐?”
“혼자 어떻게 만나냐?”
친구의 말에 제가 앞장을 서서 아현동 쪽으로 갔습니다. 선생님께 특별한 감정도 없었는데 괜히 가슴이 떨렸습니다.
친구가 말한 가구점 가까이 가는데 선생님이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먼지떨이를 들고 나오셔서 밖에 내놓은 가구들의 먼지를 털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막상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 네놈들이 여긴 웬일이냐?”
선생님께서는 느낌이 이상하셨던지 고개를 돌리고 우릴 보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릴 보고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예전보다 살이 많이 찌신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하시니까 괜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미스 김, 내 제자들이다. 박 군아! 이리 와 봐라. 내 제자들이 날 찾아왔다.”
우리는 비 맞은 병아리들처럼 주춤거리며 가구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보는 고급 침대며 장롱이나 옷장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처럼 신이 난 얼굴로 직원들을 부르셨습니다.
여직원이 나가서 음료수와 빵을 사 왔습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선뜻 빵을 먹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폈습니다.
“한만수, 먹어, 응 먹어 봐. 이 집 빵 맛있어.”
선생님께서 빵을 집어서 저한테 권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에 괜히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서 빵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억지로 제 입에 넣어 주는 통에 빵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한만수 지금도 그림 잘 그리냐?”
“아! 예…”
선생님이 갑자기 물으시는 말씀에 저는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화가보다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까, 계속 그림 연습을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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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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