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립공원’에 거는 기대 [김영환]
‘청와대 국립공원’에 거는 기대
2022.03.25
몇 년 전 고교 동창들과 어울려 세검정의 창의문에서부터 와룡공원까지 한양도성의 북악산 탐방로 구간을 걸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세검정 행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무장공비와 교전하다가 전사한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 총경(사후 경무관 특진)의 동상도 보았습니다. 1968년 1월 21일 김일성의 명령을 받은 김신조 등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일당 31명이 청와대의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산을 타고 북한에서 쳐들어왔으나 미수에 그쳤습니다. 1·21 사태는 우리의 체제를 경직화해 자유민주주의에 암운을 드리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났습니다. 종잇장으로 부지런히 서명은 했으나 남북 관계가 좋아진 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마구 늘어난 개념 없는 기자들이 N세대라며 호기심을 부추겼던 김정은 체제는 10년이 지났는데 해커들만 간단없이 컴퓨터 방어망을 뚫고 들어올 뿐 진정한 민족 화해의 기운에 변화는 없었다고 봅니다.
탐방로에서 멀지 않은 북악스카이웨이는 1970년대에 결혼식 후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기에 앞서 드라이브했던 길이라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입구에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방문 표찰을 받아 목에 걸었습니다. 오른쪽 청와대쪽은 나무가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걸어가면서 1·21사태 때 총탄의 흔적이 남은 일명 ‘김신조 소나무’도 보았습니다. 철책이 가려진 오른쪽이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자신감에서 숙정문부터 개방했죠.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서 사진 찍을 때 주의해야 했던 것만 없었다면 참 상쾌한 산행이었습니다.
대선이 끝나자 윤석열 20대 대통령 당선자는 10대 약속 중 열 번째였던 대통령실 혁신, ‘대통령실을 이전하고 기존 청와대 부지는 국민에게 돌려드린다’라는 것을 이행하려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한다고 직접 발표했습니다. 프롬프터나 A4지 따위 없이 지시봉을 들고 직접 브리핑하는 모습이 바뀐 세상을 보여줬습니다.
임기 말까지 강경파에 휘둘리는지 모든 것을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하는, 가지가지 난관이 중첩한 여소야대의 정권 교체 험로에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법조문이 없는 걸 천만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드리겠다는 약속이 잘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19대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뭐라고 선거공보에 썼던가 볼까요?
<광화문 대통령
퇴근 후 시장에 들러 넥타이 풀고/국민들과 소주 한 잔 나누는
소탈하고/친구 같은 대통령/문재인이 꿈꿔온/대통령의 모습입니다
일하는 대통령
• 청와대와 북악산은 국민께 돌려드리겠습니다.
•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일하며, 대통령의 24시간을 공개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월 1회 약속을 깨고 기자회견을 5년간 7회 했다고 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한양은 정도전이 고려 때 남경이던 한양을 답사하여 앞에 넓은 한강이 흐르고 좌에 낙산, 우에 인왕산이 자리하여 길지로 잡았다고 합니다. 땅과 물과 바람의 흐름을 헤아리는 풍수지리는 미신이 아니라 토착 과학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바뀔 때까지 500년 이상 유지되었죠.
집무실 이전이 공표되자, 한반도 역사에서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나라를 세운, 항일 독립운동가 중의 독립운동가인 우남 이승만 대통령을 무시하던 사람들이 청와대를 옮기면 해방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할 거냐고 역사를 중시하는 척합니다. 건물의 역사는 불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충청북도에 관리를 이양한 역대 대통령의 별장 인 청남대는 공개되자 곧 국민적 명소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우리 땅을 식민지로 만들고 경복궁의 기를 누르려고 전각을 헐어 조선총독부를 세웠고 더 위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세웠습니다. 청와대 자리는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 기를 눌렀고, 이후엔 더러 민주의 기를 누른 과오가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김경재 대선 후보가 청와대를 헐고 아파트를 짓자는 주장을 과거에 했겠습니까?
집무실 이전에 비용을 들여도 그건 업체들의 매출과 고용 증가로 이어질 것입니다. 민주당이 반대하자 SNS엔 이전 비용을 모금하자는 주장까지 뜹니다. 어느 군 장성 출신 여당 의원은 짐 빼는데만 20일간 24시간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는데 구내 이동이니 투입 인력이 늘어나면 이동 시간도 단축이 가능하겠죠. 현역 군인인 박정환 합동참모본부 차장은 국회 국방위에서 ‘용산 이전이 이뤄지더라도 대비 태세에는 이상이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전직 국방장관, 합참의장, 참모총장 등 대장 64명을 포함한 육·해·공·해병대 예비역 장성 1000여명’은 "안보공백 없다, 文정부 주장 어불성설"이라는 집단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평시 군사대비태세를 책임지는 합참은 대통령 집무실이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더라도 현 위치에서 그대로 임무를 수행한다. 지휘통제체계를 변함없이 유지하면서 작전준비태세를 갖추게 된다”고 밝혔습니다. 안철수 대통령직 인수위원장도 컴퓨터 보안 전문가인데 안보 공백을 용납할 리 없죠.
서울에서 서울로 몇 킬로미터 옮기는 것도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수도를 둘로 쪼개고 수십 조 원을 퍼부은 충청남도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는 찬성했을까요? 청와대까지 세종시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헌법재판소가 수도 이전을 위헌으로 판정해 제동이 걸렸죠. 문재인 정권 이전의 모든 정권에서 국가 빚이 다 합쳐 600조 원가량 늘어났는데 지난 5년간 421조 원 늘었다고 합니다. 집무실 이전 비용은 일을 더 잘하면 갚는 거죠.
개인도 이사하는 것이 귀찮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적적으로 찾아온 개혁과 쇄신, 소통의 르네상스를 놓치면 안 됩니다. 남태령과 관악산이 잘 엄폐해주는 과천도 빈 건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다 보니 무슨 위원회 간판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집무실 이전으로 10만 평이 넘는다는 청와대 일대가 역사와 문화, 체육의 국립공원으로 바뀌어 엄청난 무형의 가치를 갖죠. 다만 용산은 1·21사태가 보여주듯 산이 가린다고 해서 반드시 안전한 것은 아님을 말해주긴 하지만, 기존 북악의 청와대에 비해선 4면의 개방성이 너무 높아 경호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퇴임 후의 양산 사저에도 경호 보완용 가림막으로 3억여 원 어치의 수천 그루 나무를 심는다는 것 아닙니까?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잣대로···. 경복궁을 지나 청와대를 거쳐 북악산에 자유롭게 오를 2022년 5월 10일(화요일) 0시를 기대해봅니다. 국민의 혈세로 잘 가꾼 녹지대에서 하얀 와이셔츠 바람에 파안의 미소를 지으며 커피 컵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은 탁현민 류의 정치 연출이 아니라 국민들의 실생활이어야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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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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