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생일, 가짜 생일 [함인희]



진짜 생일, 가짜 생일
2022.03.11

제게는 서로 다른 두 날짜의 생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짜 제가 태어난 날이고 다른 하나는 호적(지금은 사라진)에 등록된 날입니다. 요즘이야 출생 신고도 컴퓨터로 입력하지만 제가 태어나던 당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인지라 생일을 이렇게 저렇게 손 글씨로 적는 과정에서 그리되었답니다.

저는 섣달그믐 날 태어났습니다.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날이지만 정작 생일을 챙겨주기는 아주 어려운 날이지요. 섣달그믐 날이면 모두들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어린 시절 생일상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이라고 상황이 달라져 그럴싸한 생일상을 받는 건 물론 아니랍니다.

친정어머니께 듣기로는 제가 인사동에 있는 조산원에서 태어났다네요. 산파는 제 어머니를 볼 때마다 “배 모양이 크고 둥근 데다 아래로 처진 것이 틀림없이 아들이라고, 그것도 장군감이라고” 장담을 했더랍니다. 내심 아들 욕심이 있던 어머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산(解産)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한데 막상 설이 다가오자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뱃속 아이가 딸이면 어쩌나, 정월 초하룻날 태어나면 팔자가 드셀 텐데’ 해서 말입니다. 다행히 설을 하루 앞둔 그믐날 새벽에 어머니는 몸을 푸셨고, 딸이라는 소식에 서운하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셨다네요.

친정 부모님에 조부모님까지 모시고 사느라 늘 분주하고 번잡했던 제 어머니를 대신해서 외할아버지께서 출생신고를 하러 가셨답니다. 지금의 주민 센터에 해당하는 동회에 가셔서 “손녀딸 출생신고 하러 왔다.”고 하니 담당 서기가 “할아버지! 늦게 오셨네요. 벌금 내셔야 합니다.” 하더랍니다. “그럼 벌금 안 내도 되는 날로 해 달라”는 할아버지 부탁에, 3월 10일생으로 호적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 가짜 생일을 갖게 된 연유입니다.

 

 



한데 제가 취학 연령이 되면서 다소 미묘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당시는 3월 1일생부터 이듬해 2월 28일생까지 입학이 가능했기에 저는 ‘열흘 상관에’ 한 해를 묵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이번엔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동회를 찾아가셨답니다. “우리 딸이 이만저만 해서 한 해를 꿇게 생겼으니 3월을 2월로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는군요. 흰 봉투를 슬쩍 건네면서요. 덕분에 2월 10일생이 된 저는 허송세월하지 않고 제 나이에 입학을 했고 무사히 졸업도 했습니다.

중학교까지는 2월 10일생으로 지내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호적등본에 적힌 생년월일을 따르라고 해서 3월 10일 생일을 되찾았습니다. 교수가 되고 보니, 이번엔 바로 그 ‘열흘 상관에’ 6개월을 더 근무하고 퇴임하게 되는 행운이 일어났답니다. 하기야 최근 퇴임한 교수 중엔 실제 나이가 세 살이나 많은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신생아 사망률이 높기도 했거니와, 출생 신고조차 주먹구구식으로 했던 ‘그때 그 시절’의 자취일 테지요.

그나저나 3월 10일이면 ‘함인희 님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더불어 ‘고객님 사랑한다’는 고백(?)까지 듣게 되니, 저로선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랍니다. 제 생일을 기억할 필요도 없고 축하할 이유도 없는 온라인 쇼핑몰, 금융기관, 이동 통신사 등에서 보내주는 의례적 메시지는 솔직히 달갑지 않습니다. 요즘은 ‘친구의 생일을 확인해보세요’란 카톡 서비스 덕분에 제자나 지인들이 축하 글을 남기기도 하는데, 이 또한 가짜 생일의 주인공 입장에선 민망하기만 합니다. 저 스스로 지나치게 까칠한 건 아닌지 반성을 하면서도, 왠지 삶 속에 담겨야 할 소박한 진정성이 소비사회의 공허한 메시지에 압도되면서, 정작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만 같아 못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올해 진짜 생일날 제가 받은 쪽지를 펴 봅니다. ‘자네 머리에 내린 눈은 이제 봄이 와도 녹지를 않는구먼. 늘 내 곁에 있어줘 고마워.’ ‘할머니 덕분에 잘 큰 것 같아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조금은 위로가 되는 듯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함인희
미 에모리대대학원 사회학 박사로 이화여대 사회과학대학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저서로는 <사랑을 읽는다> <여자들에게 고함> <인간행위와 사회구조> 등이 있습니다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