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당당해도 되는 건지... [박상도]
이렇게 당당해도 되는 건지...
2022.02.03
한 달 전쯤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에인절스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내 마리(Danae Marie)라는 속칭 인플루언서인 여성이 관중석에서 가슴을 노출하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맥주 컵을 입에 문 채 두 손으로 상의를 내려 가슴을 관중들에게 보여준 후, 가슴과 엉덩이를 흔들며 맥주를 들이켰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변의 남성들은 손을 높이 흔들며 환호하기 시작했는데, 한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와 “경기장에 아이들도 있으니 행동을 자제하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도 마리는 계속 노출을 이어갔고 이렇게 두 여자가 옥신각신하자 남성 관중들이 마리를 저지한 여성에게 “자리로 돌아가라.”며 야유를 하고 음료수를 뿌려 싸움이 커졌습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서 문제가 된 관중들을 경기장에서 쫓아내면서 사건이 마무리됐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택배 차량의 적재함에 붙은 대형 여성 노출 사진이 논란이 됐습니다. 한 택배 기사가 배송 차량 내부에 여성 노출 사진을 붙이고 배송업무를 해오다가 지나가던 주민이 이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민은 택배사 고객센터에 “오늘 오후 1시 40분경 아파트 근처에 탑차 문을 열어둔 채로 세워두셔서 지나가다가 내부를 보게 되었다. 탑차 내부 벽면에 벗은 여성들의 큰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작은 사진도 아니고 먼 거리에서 지나가면서 보기에도 눈에 띌 정도였다. 아이들도 지나다니는 아파트 입구 길목인데 아이들 교육에도 좋지 않고 어른들이 보기에도 혐오감이 든다. 빠른 시정 부탁드린다.”라고 시정을 요청했고, 택배사 측은 “담당 기사의 만족스럽지 못한 서비스로 인해 불편 드려 죄송하다. 관할 지사로 전달하여 추후 이용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개선 및 시정 조치했다.”라며 “담당 기사로 인해 언짢으신 마음이 풀리지 않으시겠지만 다시 한번 사과 말씀드린다.”라고 답하면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의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반전이 시작됐습니다.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김나정 아나, ‘짐칸 女노출 사진’ 택배기사에 “연락주세요”>였습니다. 그밖에도 주요 신문사에 같은 내용의 뉴스가 등장했는데, 내용은 택배차량 짐칸에 붙은 사진은 성인잡지 ‘맥심’에서 제작한 달력이고 맥심의 모델인 김나정이 해당 택배기사에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본인의 사비로 맥심 정기구독권 2년치를 보내주겠으니 연락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개인 소유의 차량 밖에 붙인 것도 아니고 짐칸 내부에 붙인 게 과연 비난받을 일인가? 문이 열려 있었다는 걸 문제 삼는 분들도 계신데, 물류차량에서 짐을 내리는데 문을 안 열고 어떻게 일을 하냐.”는 얘기도 덧붙였다고 합니다.
홍보차원에서만 본다면,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성인잡지 ‘맥심’과 ‘김나정’입니다. 택배 짐칸의 사진이 문제가 되자 맥심은 발 빠르게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김나정을 출연시켜 택배 기사를 찾는다는 돌발 발언을 해서 이슈를 증폭시켜 세간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습니다. 김나정 씨도 자신의 이름이 주요 일간지 기사에 소개되었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 부정적 기사조차도 도움이 된다는 홍보 이론이 있는데,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이 됐으니 그냥 지나치기에는 이 기회가 아까웠을 겁니다. 온라인상의 트래픽이 돈이 되는 세상이니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는 생각이었겠지요.
기사에는 김나정 아나운서라고 소개되는데 스스로 자신을 아나운서라고 칭하는 분들이 많아서 일일이 대응할 필요를 그동안은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논란이 된 대한항공 여승무원 룩북 영상처럼 직업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라 판단되어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자면, 방송사의 직원이 성인 잡지의 수영복 모델을 하는 일도 없지만, 만약에 독단적인 판단으로 이 같은 일을 하게 된다면 사규에 명시된 직원의 품위손상 조항에 따라 심각한 중징계를 받게 됩니다. 다만, 매체에 따라 직원 신분이 아니거나 고용관계가 느슨한 경우 즉,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 출연자의 경우는 개인의 활동에 제한을 하지 않습니다.
애너하임 구장의 가슴 노출녀와 갑자기 “택배 짐칸 사진의 주인공이 나다.”라며 등장한 김나정 씨의 공통점은 대중의 관심이 필요한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서 직업적인 인플루언서 또는 유튜버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느슨한 규제 속에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러한 현상이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에도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그 여자 정신병이 있는지 의뢰해 봐야겠다. 일부 노출 사진으로 불쾌하다 ,교육상 안 좋다고 하는데, 이게 불쾌하면 애는 어떻게 낳았누?>라는 댓글에 공감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일곱 배가 많았습니다. 애너하임 구장에서 가슴을 노출한 인플루언서에 항의하다 음료수 세례를 받은 여성처럼 택배 짐칸의 대형 노출 사진에 항의한 주민이 공격을 당하는 모습입니다. 그 와중에 사진의 주인공은 당당하게 “그게 나였어.”라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물론 짐칸에 걸린 사진이 개인의 사생활에 해당하는 영역이라는 점과 사진의 수위 역시 애너하임 구장의 가슴 노출녀와 같지 않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두 사건의 맥락을 짚어보면 쾌락에 대한 관대함과 이를 방해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 발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두 사건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이렇게 알려질 정도로 가치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기사들과 댓글들을 보며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자꾸 의심이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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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BECA 석사
현재 SBS아나운서
2006 자유칼럼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