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여행의 추억 [한만수]
무전여행의 추억
2022.01.19
여행은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일상을 떠나서 낯선 거리를 거닐거나 풍경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마음의 여유를 찾게 만듭니다. 늘 먹던 음식이라도 다른 지역에서 먹으면, 새로운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즈음 국내 여행은 대부분 차를 가지고 가는 까닭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보다는 낭만이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여행 일정도 구체적으로 짜지 않고 대충 떠납니다. 마음먹었던 여행지에 갔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무전여행이 유행했습니다, 무전여행(無錢旅行)은 말 그대로 돈 없이 최소한도의 먹을 것만 준비해서 떠나는 여행입니다. 학생 신분이라서 먹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 돈 없이 떠난다는 모험심도 재미를 더해 줍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 5명이 보은 속리산까지 무전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요즈음은 영동에서 자동차로 가면 속리산 입구까지 1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그 시절에는 영동에서 보은까지 가는 버스도 없고, 걸어가야 하는 까닭에 굉장히 멀게 느껴졌습니다.
요즘처럼 캠핑 장비가 갖춰진 것도 아닙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동네 형이 가져온 미제 군용텐트에, 군용 배낭과 수통이 전부였습니다. 한 친구는 냄비를 가져오고, 다른 친구는 그릇을, 또 다른 친구는 쌀과 반찬이며 된장을 가져오는 것으로 출발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무리 무전여행이라고 하지만 비상시에 사용할 돈으로 1인당 3천 원씩을 걷었습니다.
일정은 넉넉히 4박 5일로 계획을 했습니다. 한 끼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다들 집에서 배가 부르도록 점심을 먹고 보무도 당당히 출발했습니다.
영동에서 14km 떨어진 용산을 지나면 옥천군입니다. 옥천군 청산면을 거쳐서 보은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여름이라서 100m도 안 갔는데 온몸이 땀에 젖었습니다. 그래도 즐겁다며 낄낄낄 웃거나, 뛰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걸었습니다. 1시간 정도 걸어서 금강지류를 만났습니다.
“야! 우리 저기서 목욕 좀 하고 가자.”
산자락을 끼고 흐르는 냇물을 보니까 땀을 씻어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누군가 던지는 말에 모두 냇가로 몰려갔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물속으로 들어가니까 너무 시원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원래 계획은 첫날은 영동에서 14km 떨어진 용산을 지나 10km 더 간 후에 옥천군 청산강(靑山江)가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자는 것이었습니다. 냇물에 몸을 담그고 땀을 식히다 보니 강바닥에 다슬기가 많았습니다. 계획은 급하게 변경이 됐습니다.
“다슬기를 잡아서 국을 끓여 먹고 날씨가 시원해지는 밤에 출발하자.”
누군가의 제안에 모두 손뼉을 쳤습니다. 충청북도는 바다가 없는 지역이라 통행금지가 없었습니다. 밤길을 걷는 것도 좋다는 생각에 다들 다슬기 잡기에 들어갔습니다. 다슬기를 잡으려면 허리를 굽혀 물속을 살피며, 돌을 들어 보거나 모래가 있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한 마리를 잡으면, 저쪽에 또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 다슬기를 잡으면 다른 쪽에 있는 다슬기가 보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슬기를 잡다 보니 꽤 많이 잡았습니다. 다슬깃국을 끓이려면 부추도 있어야 하고, 대파와 고추도 있어야 합니다.
일부는 다슬깃국 끓일 준비를 하고, 두 명은 밭이 있는 곳으로 가서 부추며 대파 고추를 따 오기로 했습니다. 다슬깃국을 끓이려면 물을 펄펄 끓여서 깨끗이 씻은 다슬기를 넣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탱자나무 가시 같은 것으로 다슬기 살을 파먹기가 쉽습니다.
다슬깃국이 완성됐습니다. 일단 익은 다슬기를 모두 꺼냈습니다. 국물에 밥을 말아 먹은 후에 다슬기를 까먹기로 했습니다.
“야! 우리 어차피 밤에 출발할 거니까 다슬기에 소주 한 잔씩 하면 어떨까?”
다들 농촌에 사니까 논이며 밭에서 일하다 보면 어른들이 따라주는 술을 한두 잔씩 하는 처지입니다.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다슬깃국 앞에서 소주를 마시자는 말에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원래 다슬기하고 술하고 궁합이 맞습니다. 술을 많이 마신 이튿날 아침 해장국은 다슬깃국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간이 안 좋을 때도 다슬기로 담근 술이 특효약입니다.
배낭 안에는 나흘 동안 마실 소주가 들어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학생들이라 2홉 들이는 못 사고 4홉들이 4병을 준비했었습니다.
산을 끼고 있는 냇가라서 바람은 상쾌하기만 합니다. 10리 길을 걸어오느라 땀을 쭉 빼고, 물속에서 서너 시간을 보낸 뒤니까, 다슬기를 안주 삼아 마시는 술은 알코올이 아니고 청량음료였습니다.
이윽고,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낮 동안 깊은 물 속에 숨어 있던 물고기들이 앞을 다투어 물 밖으로 튕겨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또 누군가 냄비를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자는 제안에, 된장을 넣은 냄비를 손수건으로 싸맸습니다. 손수건에 구멍을 내서 여울이 흐르는 곳에 담가 놨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에는 피라미며, 붕어, 꺽지, 새우, 미꾸라지, 가재가 섞인 매운탕이 준비되었습니다. 희생정신이 강한 친구 두 명이 장마 때 떠내려온 나뭇가지를 모아서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우리는 매운탕을 안주 삼아서 세 번째 소주병을 간단히 비웠습니다. 나머지 한 병은 진짜로 마시지 말자고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었지만, 1시간 후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약속을 깼습니다.
배는 부르겠다, 취기는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고 있겠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인가가 없는 곳이라서 가끔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 불빛이 아니고는 사방이 고요했습니다. 기타도 없는데 합창 소리에 개다리춤을 추고, 막춤을 추는 사이에 문득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하늘에는 무수하게 많은 별들이 떠 있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바람이 불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별빛에 취해 한두 명씩 자갈밭에 누웠습니다. 자갈밭에 누워 있으니까 그동안 들리지 않던 개구리 울음소리며, 소쩍새가 처량하게 우는 소리가 부드럽게 잠의 여신을 끌어당겼습니다.
새벽녘에 으스스하게 추워서 눈을 떴습니다. 어느 틈에 텐트가 쳐져 있었습니다. 다섯 명 중에 두 명이 텐트 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아늑하게 잠을 잤습니다. 점심 무렵에야 일어난 우리는 누가 먼저 "그냥 집으로 가자."는 말을 하게 될까 가자미눈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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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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