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로 파커 [박종진]
리베로 파커
2021.12.10
-리베로(libero)는 자유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이지만, 축구의 수비수 역할을 맡으면서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는 선수, 골을 넣는 수비수로 프란츠 베켄바워(독일)가 가장 유명하다.-
1920년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회사는 워터맨(Waterman), 셰퍼(Sheaffer), 콘클린(Conklin)과 파커(Parker)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워터맨은 1883년 세기(世紀)에 한 번 있을까 하는 천재적인 생각을 실현하여 실용적인 만년필의 세계를 열고, 마이다스 손처럼 만지는 것마다 성공하는 명실상부 최고(最古)와 최고(最高)라는 두 개의 타이틀을 가진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했고, 가만히 있어도 팔리는 관성(慣性)에 빠져 있었습니다.
반면에 1913년 혜성(彗星)처럼 등장한 셰퍼는 한 세대 전 워터맨이 그랬던 것처럼 혁신(革新)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1920년에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던 평생보증과 플라스틱 만년필까지 크게 성공하여 1925년 전미(全美) 점유율 20%가 됩니다.
1913년부터 1925년까지 호황이었던 만년필 세계는 400% 성장했습니다. 같은 기간 셰퍼의 성장은 2,000%. 정말 드라마 같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이었습니다.
콘클린은 셰퍼보다 훨씬 먼저 워터맨을 위협했던 회사입니다. 콘클린 이전 만년필들은 잉크를 넣으려면 몸통을 열고 스포이트로 잉크를 넣어 불편했습니다. 콘클린은 만년필 몸통에 고무로 된 기다란 잉크 주머니(rubber sac)를 넣고, 이것을 누를 수 있는 초승달 모양의 고리가 달린 판을 같이 넣어, 이 고리를 누르면 고무 잉크 주머니가 수축했다가 다시 확장하면서 잉크가 들어오는 방식을 개발, 워터맨이 휘청거릴 만큼 크게 성공했었습니다.
워터맨이 황급히 클립을 달고 잉크가 새지 않는 안전한 세이프티(safety) 방식의 만년필로 대응(對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최고(最高)의 타이틀은 콘클린이 차지했을지도 모릅니다.
앞의 세 회사가 창조적인 공격수라면 파커는 골을 넣는 수비수입니다. 1888년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워터맨만큼 오래된 회사이나 딱히 다른 회사를 압도하거나 판도(版圖)를 바꿀 만한 발명은 없었습니다.
1894년 특허를 받은 럭키커브(Lucky Curve) 피드(feed:잉크를 펜촉까지 전달하는 부품)가 있지만 워터맨의 스푼 피드나 콘클린의 초승달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커 장기(長技)는 뛰어난 공격수를 알아보는 넓은 시야였습니다. 경쟁회사의 것이라도 그것이 성공하면 파커는 기가 막히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자기방식으로 소화하여 그 유행에 올라타는 것이었습니다.
워터맨의 스푼 피드는 스피어 헤드 피드로, 책상에서 구르지 않고 편리한 콘클린의 초승달은 클릭 필러, 워터맨의 세이프티는 잭 나이프 세이프티로. 사실 1921년 출시하여 대히트한 위아래 검고 몸통이 빨간 색인 듀오폴드 또한 셰퍼의 라이프 타임을 반쯤은 따라한 것입니다. 떨어뜨려도 망가지지 않을 정도의 딱딱한 펜촉이 장착된 것과 평생보증에 약간 모자라는 25년 보증에 가격은 1.75불 싼 7불로 경쟁력이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수비에 치중하던 파커가 1933년 5년간의 연구와 1년간의 테스트를 거쳐 새로운 만년필을 선보였는데, 진공 충전의 뜻을 가진 버큠 필러(Vacuum-filler)란 만년필이었습니다. 나중 이 만년필은 버큐메틱(Vacumatic)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그때까지 파커 만년필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만년필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가장 혁신적이었습니다.
크게 네 가지가 달랐는데 셔츠에 꽂게 달려 있는 1. 클립은 화살모양이었고 2. 펜촉에도 화살이 새겨져 있고 3. 잉크가 102% 더 들어가고 4. 몸체는 진주같이 빛나는 가로 줄이 촘촘하게 있어 밤에 보이는 불 켜진 마천루 같았습니다.
(좌) 파커 버큐메틱 1940년대, 아름다운 화살 클립을 달고 있다.
(우) 파커 버큐메틱 1940년대, 화살이 새겨진 펜촉
이 한 번의 공격은 대단했습니다. 워터맨과 콘클린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셰퍼와의 주도권 싸움에서도 이겨 약 반 세기 동안 만년필 세계의 왕좌에 앉게 됩니다. 단 한 번의 승리로 세상을 거머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었습니다. 마치 만년필이 자연계의 원리로 글이 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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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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