쉘 위 댄스?[박종진]

 

 

쉘 위 댄스?

2021.11.11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감싸듯 만년필을 잡는다. 힘을 빼고 겨드랑이에서 팔을 살짝 때고 펜을 세우는 각도는 45~55도. 뚜껑을 꽂고 써도 되고 빼고 써도 되지만 펜촉과 일직선으로 꽂으면 마치 넥타이를 한 것처럼 멋있다. 잉크는 정통(精通)한 것을 넣어주고, 예민한 펜촉을 보호하기 위해 글씨를 다 쓰면 뚜껑은 바로 닫아준다. 그리고 애정을 담아 매일 매일 써주면 만년필은 당신의 유일무이한 파트너가 된다.

 

영화 ‘쉘 위 댄스’ 역시 파트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중견 기업의 경리과장인 주인공은 퇴근길 전철에서 댄스 교습소 창문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미모에 끌려 댄스교습소에 등록하게 되고 그의 댄스생활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나요. 미모의 선생님은 눈길도 안 주고 기초적인 스텝조차 엉뚱한 마음을 품은 주인공에겐 어렵기만 합니다.

 

 

만년필도 이와 비슷하게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으로 만들어진 펜촉과 화려한 캡 링과 곡선이 부드러운 클립 등 아름다운 외관에 매료되어 덜컥 들이게 된 경우입니다. 딸깍하고 버튼을 눌러 바로 쓸 수 있는 볼펜과 달리 만년필은 잉크를 넣어주어야 하는데, 잉크를 넣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현대 만년필의 잉크 넣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개발된 컨버터방식과 독일에서 처음 선보인 피스톤방식이 있습니다. 컨버터는 잉크가 들어 있는 카트리지를 쓸 수 있어 컨버터 및 카트리지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둘의 방법은 같습니다.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고, 컨버터방식은 몸통을 열고 속에 있는 컨버터를 돌려 잉크를 넣는 반면 피스톤방식은 몸통을 열지 않고 1.뒷부분의 꼭지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끝까지 돌렸다가 2.다시 시계 방향으로 끝까지 돌리면 잉크가 채워지게 됩니다. 3.그리고 부드러운 휴지로 펜촉에 남아 있는 잉크를 깨끗이 닦아주면 됩니다. 잉크를 바꾸거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세척은 잉크병이 아닌 맑은 물 한 컵에 떠서 펜촉을 담그고 위의 방법과 같이 하면 됩니다.

 

 

정통한 잉크는 유명하고 오래된 만년필 회사에서 나온 검증된 잉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파커 블루, 오로라 블랙, 펠리칸 블루, 몽블랑 블루 같은 잉크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사용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잉크를 빼고 세척해서 보관해야 합니다. 잉크가 채워진 채로 만년필을 그냥 두면 그 잉크가 굳어 잉크가 나오는 길을 막고, 한편으로는 내부의 부품이 부식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년필은 고급 자동차처럼 관리를 해야 하는 매뉴얼이 필요한 필기구입니다. 재미있는 모든 것의 처음은 어렵습니다. 댄스도 만년필도 말입니다.

 

 

댄스가 어려워도 주인공은 교습소에 계속 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움츠렸던 어깨가 활짝 펴지고 허리도 곧게 세우고 발걸음에도 활기가 생겼습니다. 골프에 빠진 사람들이 우산을 휘두르는 것처럼 주인공은 전철을 기다리면서도 스텝을 밟았습니다. 미모의 선생님 때문이 아닌 댄스 자체에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이지요.

 

노을같이 고운 붉은 색, 맑고 밝은 터키 옥색 블루,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하고 위험한 정글을 표현한 녹색 등 그 끝을 알 수 없는 잉크의 세계도 있고, 아름다운 외관도 중요하지만 만년필의 진정한 재미는 내가 만들어가는 나만의 필기감입니다. 만년필의 펜촉 끝엔 이리도스민 또는 오스미리듐이라고 불리는 아주 단단하고 비싼 합금이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해도 잉크를 몇 번 채우고 비우면 펜 끝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내게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같은 획(劃)도 이전보다 매끄럽게 써지고 펜 끝이 종이를 스치며 나는 "슥 슥" 소리는 역시 예전보다 훨씬 듣기 좋습니다. 내 필기습관에 맞게 아주 조금 만년필이 내게 한 걸음 다가온 것이지요.

 

그렇게 조금씩 잉크 한 병이 다 비워질 때가 되면 내 손과 만년필은 마치 춤추는 것처럼 자유롭게 종이를 날아다니게 됩니다. 거짓말 같은가요? 돌아오는 주말 시내에 나가 만년필 한 자루와 잉크 한 병을 사서, 만년필을 파트너 삼아 “Shall we dance?”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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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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