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분→장자 상속 과도기 틈탄 조선시대 실종·사기 실제 사건

 

권내현 고려대 교수 분석

 

   “16세기 중반 한 남자가 아내를 남겨두고 집을 나갔다. 세월이 흘러 어떤 사람이 그 남자라고 주장하며 돌아왔다. 주변에선 과연 그가 맞는지 의심했고, 그는 재산 상속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다. 나중에서야 집을 나갔던 ‘진짜’가 돌아오는데….”

 

1982년 제라르 드파르디외 주연의 프랑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농민 마르탱 게르(1524~1560)의 실화다. 그런데 같은 시기 조선에서도 흡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권내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연구서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너머북스)에서 이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 상속 제도의 변화를 추적했다.

 

 

일러스트=양진경

 

 

1556년(명종 11년), 대구 양반 가문의 차남 유유(柳游)가 가출했다. 그 뒤 부친이 사망했고, 동생 유연이 형 대신 집안 대소사를 주관했다. 그런데 7년 뒤에 해주에 살던 채응규란 사람이 자기가 유유라고 주장하며 돌아왔다. 얼굴과 체형이 달라 사람들은 가짜라고 의심했으나 채응규는 “결혼 첫날밤에 보니 아내가 겹치마를 입었더라”는 비밀스러운 사실을 밝히며 진짜라고 강변했다. 그런데 채응규가 돌연 실종됐고 유유의 아내인 백씨는 남편을 죽였다며 시동생 유연을 고발했다. 백씨는 채응규가 데려온 아들을 자기 아들로 거둬들였고, 유연은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16년이 흐른 1579년(선조 12년) 반전이 일어났다. 진짜 유유가 평안도에서 거지 행색으로 살고 있었음이 밝혀진 것. 사라졌던 채응규는 체포돼 압송 도중 자살했다. 진짜 유유는 아버지의 상장례에 참여하지 않아 인륜을 저버린 죄로 장형 100대와 도형(노역형) 3년을 받은 뒤 대구로 귀향해 2년 뒤 죽었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과 이항복의 ‘유연전’ 등에 기록돼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

 

권내현 교수는 이 사건에 대해 “조선 전기의 ‘균분(均分) 상속’이 17세기 이후의 ‘장자 우대 상속’으로 넘어가기 직전 과도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만약 이 사건이 조선 후기에 벌어졌더라면 일찍 죽은 장남 유치가 양자를 얻어 가계(家系)를 이었을 것이고 유유와 유연은 상속에서 우대를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16세기 조선 사회에선 균분 상속의 틀이 유지되는 가운데 가계 계승자의 몫이 늘어나고 있었고, 적장자에게 아들이 없으면 남동생이 제사를 받드는 형망제급(兄亡弟及) 규정도 있었다. 따라서 ▲차남 유유는 적통을 이을 수 있었고 ▲유유의 아내 백씨는 상속에서 불안한 위치를 고려해 채응규의 진위를 적극적으로 가리지 않다가 실종 뒤 남편임을 인정했으며 ▲유유의 동생 유연은 형을 죽이고 적장자의 지위를 빼앗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권 교수는 이후 조선 후기 장자 우대 상속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던 이유로 상속 재산의 축소를 들었다. 이와 함께 상속 갈등과 송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하지만 21세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희미해지면서 다시 균분 상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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