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의 출입금지 팻말 [추천시글]





잔디밭의 출입금지 팻말
2021.06.28

유월 초목이 싱그럽습니다. 인간에겐 그렇게 포악한 바이러스도 자연에겐 관대한 것일까요? 여느 여름처럼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산야를 덮었습니다.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영양분이 모자라서일까요. 잎사귀들이 엷은 노란색을 띄어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많은 풀 종류 중에서도 잔디는 마음을 끌어당기는 식물입니다. 로맨틱합니다. 낮게 촘촘히 땅을 기어가며 주변 공간에 여유를 줍니다.

 


​잔디를 보면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이 있습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잔디 씨를 한 홉씩 채취해오라고 할당했습니다. 잔디 씨를 왜 채집하는지 몰랐습니다. 소문에는 선생님들의 돈벌이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일제의 동원령과 6·25전쟁의 경험이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을 때라 이런 일이 식은 죽 먹듯이 일어났습니다.


6학년 학생의 인솔 아래 몇 명이 떼를 지어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잔디 열매가 보이면 달려가 손으로 씨를 훑어 주먹만 한 나무상자(1홉)에 담았습니다. 요즘처럼 플라스틱컵도 없을 때니 집에 있는 제기(놋잔)를 용기로 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잔디 씨는 참깨만큼 작습니다. 요령이 없는 저학년 학생들은 며칠을 들판을 돌아다녀야 한 홉을 모을까말까 했습니다.


나중에 서울의 대학 캠퍼스를 보면서 잔디밭이 멋지다는 것을 느꼈고, 내가 애써 모았던 잔디 씨가 어디에 쓰였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잔디 축구장이나 골프장이 정말 낯설 때였습니다. 잔디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건 보통 사람은 이룰 수 없는 로망이었습니다.

​잔디밭에 푹 빠져 본 것은 캘리포니아에 살 때 골프를 치면서입니다. 골프도 재미있었지만 누런 사막에 물을 뿌려 키운 잔디를 밟으며 걷는 게 좋았습니다. 당시 4, 5 달러만 내면 하루 종일 퍼블릭코스의 잔디밭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고달픈 이민 생활을 하는 교민들에겐 "천국 같다"는 말이 나올 만도 했습니다.

 

한 번은 골프장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워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미국인이 나를 살짝 부르더니 "골프장에 앉지 말라"라며 그 이유를 설명해줬습니다. 독한 농약을 많이 치니 하반신에 해롭고 또 라임병에 걸린다고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라임병은 사슴진드기가 옮기는 아주 몹쓸 병입니다. 그 후 잔디밭에 드러눕는 로맨틱한 꿈은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잔디밭을 보면 그 위를 걷고 싶습니다.

잔디밭, 특히 캠퍼스나 공원의 잔디밭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그런 것 같습니다. 잔디밭은 푹신푹신한 발의 감촉을 느끼며 걷는 맛이 일품입니다. 그런 욕구를 제지하는 게 출입금지 표시입니다. 사람의 습성이란 이상해서 잔디가 무성한 곳을 밟고 다니기보다 길이 조금 난 곳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잔디밭이 버짐처럼 보기 싫게 훼손됩니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잔디밭 관리자는 잔디가 망가지는 것을 보는 게 스트레스입니다. 잔디는 회복력이 빠릅니다. 출입금지가 가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본 그 캠퍼스의 잔디밭엔 옐로라인, 즉 금줄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출입금지 팻말(사진)도 꽂혀 있었습니다. 이미 기말 고사도 끝나고 비대면 수업이 많아서인지 캠퍼스엔 사람의 발길이 뜸했습니다.
팻말에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잔디밭 출입금지'

'이건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박쥐 등 동물을 숙주로 삼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잔디 같은 초목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떼지어 잔디밭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아이디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잔디밭 보호를 위해 '코로나19 확산 방지'라는 팻말을 만들어낸 잔디 관리자의 조치는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악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지금 코로나19를 방패삼아 진실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사람들이 세상 구석구석에 많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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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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