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코스모스 꽃과 육종 유감 [추천시글]

카테고리 없음|2021. 6. 22. 16:37

 




여름 코스모스 꽃과 육종 유감
2021.06.22

집 근처의 근린공원에 지난봄 어느 날 코스모스 40여 포기를 심었습니다. 지난날 어른들이 하던 방법을 고대로 따랐습니다. 술 취한 누가 짓밟거나, 제초 작업하는 이들이 무심코 잘라내지만 않는다면 가을에는 꽃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결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코스모스 가지가 채 벌기도 전, 6월도 안 돼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여름이 온 것은 아니다’라는 외국 속담을 떠올리기는 했으나 의아했습니다. 돌연변이거나 아는 이가 이야기했던 철부지(-不知)가 아닐까요. 자세히 살펴보니 벌써 구슬 아이스크림의 알갱이보다도 더 작은 꽃 몽우리가 모든 가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몽우리를 손톱으로 하나하나 뜯어냈습니다. 가지를 더 뻗게 하고, 개화기를 늦출 요량이었지요. 이제는 몽우리 따기가 일과처럼 되었습니다. 그 효과 덕에 가지를 많이 뻗었고, 꽃 피는 시기가 강제로 늦춰지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더 늦춰볼 요량입니다만 가을까지는 어렵겠습니다. 자연현상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에 꽃을 보고픈 마음에 꽃목을 미리 자릅니다. 혼자의 욕심이지요. 식물학대죄가 없는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지나가면서 저를 보고 구시렁구시렁 거렸습니다. 때로는 눈을 흘겼습니다. 아마 할 일 없는 사람이 꽃을 훼손한다고 생각했겠지요. 어느 여성은 대놓고 “공원의 꽃줄기를 그렇게 함부로 자르세요?”라고 힐난조로 따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대답하기도 그래서 그냥 “그러냐”며 웃어넘깁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습니다. 때로는 위안도 얻습니다.

개화기를 억지로 늦추려는 것은 코스모스가 원래 가을 서리가 내릴 때쯤 피는 '가을꽃'(실제는 6~10월에 핀다고 함)이라고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싸늘한 가을 아침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는 가련하면서도 애처롭고 애틋합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아니나 애잔한 마음이 절로 우러납니다. 청초한 아름다움을 능가할 꽃이 없지요.

가을을 고집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필자는 보은 속리산으로 가는 길목의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습니다만 봄이면 주민과 학생들이 신작로 가에다가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가을에는 꽃이 도로 양옆에 만발했습니다. 버스가 가끔 지나가면 우린 승객들을 향해 고사리손을 흔들었습니다. 어쩌다 승객이 마주 보며 손을 흔들면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라며 검은 책보를 하늘로 던지며 환호했습니다. 양철 필통 속의 연필과 도시락 안의 숟가락이 공중에서 요란하게 소리를 냈고, 우린 코스모스 꽃잎을 훑어 하늘로 날렸습니다. 저학년 하교 때는 꽃을 꺾어 가위바위보를 해 이기면 꽃잎을 한 장씩 따내는 놀이를 했습니다. 고학년 때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튕겨서 먼저 다 떨어뜨리거나, 돌팔매로 꽃목을 잘라내는 아주 단순한 장난을 요즘 유행하는 어느 전자 게임보다도 즐겼습니다.

 


여름의 코스모스 꽃은 30년 전쯤 엣 몽골 제국의 수도 하라호름(영어로는 카라코름)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7월 초였는데 에르덴조 사원과 돌거북 주변에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습니다. 황량한 주변과 달리 아주 새빨간 꽃이 파란 하늘과 대조되어 아름다웠습니다. 몽골의 기후가 워낙 추워서 기후에 맞추느라 일찍 피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9월 초순이면 다가오는 추위를 떠올리며 무심하게 넘겼습니다.

여름에 피는 코스모스 꽃이 요 몇 해 사이에는 자주 보이자 생각을 달리합니다. 원예학 시간에 배웠습니다. 육종(育種)의 결과가 씨앗 속에 숨겨진 것은 아닐까 의심해 봅니다. 시중에서 파는 모든 씨앗은 생산량이 극대화되도록 조절된 것입니다. 모든 좋은 조건은 그다음 해에 다 이어지지 않습니다. 온갖 열성 조건이 다 발현될 수도 있는 상태가 됩니다. 당대에만 ‘반짝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묘상에서 씨앗을 사서 뿌리면 농사를 망칠 염려가 줄어들고 생산량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에 씨앗으로 사용할 수 없어 다시 씨앗을 돈 주고 반드시 구입해야만 합니다. 종묘회사와 농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입니다. 실제로 금년 봄 지인에게서 얻은 호박씨와 여주씨를 심었다가 낭패를 보았습니다. 발아율이 턱없이 낮았습니다. 다시 씨앗을 구입해 심었습니다.

 



요즘은 코스모스를 보며 마음을 다스릴 때가 많습니다. 담배꽁초가 던져져 있던 날은 참았습니다. 빈 담배 갑이 있던 날은 주웠습니다. 짓밟힌 코스모스는 낙엽을 긁어모아 북을 주었습니다. 꺾어진 코스모스는 나뭇가지로 지지대를 세웠습니다. 강아지 똥이 있던 날은 웃었습니다. 누가 공짜로 거름을 주었으니까요. 흙과 꽃을 만지느라 손톱 밑이 까맣게 된 적도 있습니다. 헌 칫솔로 손톱 밑을 닦다가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괜한 짓이라고. 한편으로는 공공의 것을 지키려는 선진 시민의식이 많이 자랐다는 것을 몸소 체험합니다. 그와 함께 코스모스가 본래의 가을 꽃 특질만을 갖는 것으로 육종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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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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