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구글에 왔을 때 ‘여긴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김은주 구글 수석디자이너 인터뷰

 

   “처음 구글에 왔을 때는 ‘여긴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하지만 이젠 그게 구글의 힘이라는 것을 압니다.”

 

  김은주 구글 수석디자이너. /김은주씨 제공

 

 

지난 9일(현지시각)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김은주(49) 구글 수석디자이너는 구글에서 일하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구글에서는 이 팀, 저 팀이 하는 일이 막 섞여 있고 정리가 안 되는듯한데 나중엔 굉장히 일이 잘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이다. “구글은 거대한 기업이지만 안에서 보면 벤처 플랫폼 같습니다. 수백개의 벤처·스타트업이 모여 한 회사가 된 것이죠. 알아서 일해 성공하면 좋고, 실패했을 때 패널티가 없습니다. 그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를 학습할 뿐이죠.”

 

김은주 수석디자이너는 이화여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지틀조선일보, CJ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했다. 미국 일리노이공대에서 유학한 후 블랙웰 컨설팅, 모토로라, 퀄컴, 삼성전자를 거쳐 현재 구글에서 일하는 웹디자이너 1세대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턴 등을 포함하면 총 10번의 이직을 한 ‘프로이직러’다.

 

그를 만난 건 최근 그가 ‘25년간 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일하며 배운 것들-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라는 책을 낸 것이 계기가 됐다. 구글에서 일하는 프로이직러가 전하는 위로서이자 자기계발서다. 그는 “여러 차례 이직하며 겪은 경험과 아픔을 공유하며 ‘너무 늦은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30대에게 도움이 되고자 책을 썼다”고 했다.

 

김은주 구글 수석디자이너의 이직 그래픽. 기자가 그의 이직 이력에 대해 질문을 이어가자 그가 디자이너답게 이 그래픽을 보내왔다.

 

 

프로이직러의 삶

그는 업계에서 알아주는 UX(사용자 경험) 디자이너다. UX 디자인이란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경험을 디자인한다. 좀 더 사용자가 쓰기 편하게 시각 정보나 음성 정보 등을 배치하고 만든다.

 

그는 2015년 삼성전자에서 최초로 동그란 원형 디스플레이 스마트워치(삼성 기어 S2)를 개발했다. 2016년 ‘웨어러블 산업을 이끌 글로벌 18인의 여성 리더’에 선정됐고, IDEA 디자인 브론즈상을 대표 디자이너로 받았다. 당시 그는 ‘애플보다 우아한 삼성의 인터페이스를 만든 디자이너’로 불렸다. 현재는 구글의 음성비서 시스템인 구글 어시스턴트 UX 디자인을 맡고 있다. 사람과 기계가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일이다. 작년엔 구글에서 올해의 디자이너로 뽑혔다.

 

그가 모토로라, 퀄컴, 삼성, 구글로 이직한 이유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는 “가장 두려운 것은 지겨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전 전성기를 내 안의 열정과 아이디어가 가득 차서 왕성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당장은 실패하더라도 노력하고 배우며 보물을 찾는 과정이 재밌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잘 나갔던 그는 2018년 구글 수석디자이너로 자리를 옮겼다. 연차와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레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요구됐는데, 관리자보다는 퇴직할 때까지 현직 디자이너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실력이 검증된 그도 구글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글에 모인 천재들 사이에서 열등감에 시달렸고, 무력감에 빠졌다. 특히 ‘왜 이 사업을 해야 하는지’ 논의할 때의 구글 특유의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구글은 ‘꿈팔이’들이 모인 곳이에요. 페이스북은 데이터 중심, 아마존은 고객 중심인데, 구글은 영향력(인플루언스) 중심이에요. 이 사업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왜 해야 하는지 등 철학적이면서 장대한 비전을 이야기하며 설득하죠. ‘왜’라는 자기 생각이 없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김은주 수석디자이너가 2015년 UX를 설계한 삼성 기어 S2. /삼성전자

 

모토로라, 퀄컴, 삼성전자, 구글의 차이점

프로이직러가 느낀 글로벌 테크 기업 간 차이점은 무엇일까. 김은주 수석디자이너는 “한국 기업, 미국 기업 간 차이보다는 하드웨어 회사인지 소프트웨어 회사인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제품 출시 일정 등이 정해져 있고, 판매가 안 될 경우 타격이 커서 유연성이 떨어지지만 하드웨어 제조 능력이 뛰어나고 체계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모토로라는 삼성전자와 비즈니스는 비슷하지만 다양한 인종이 모여 일하는 환경에서 나오는 다양성이 크다. 라이선스 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퀄컴은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 기술을 준비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 구글은 데이터를 중심으로 수많은 테스트와 업데이트가 실시간 이뤄지는 식으로 일한다. 그는 “특히 구글에서는 직급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김은주 수석디자이너는 “미국 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덴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적 문제, 성별의 문제 등 여러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억지로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려 애쓰는 건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집짓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공사와 골조공사잖아요. 내면의 힘을 키우면 실력을 키우거나 일을 잘하는 외장공사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글로벌 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비결을 ‘까짓 꺼 아니면 말고’ 정신을 들었다. 부족하더라도 일단 시도를 해보니 길들이 열렸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참 많아요. 하지만 ‘한번 찔러보자. 아니면 말고’의 정신이 중요해요. 많은 사람이 다양한 도전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라는 마음으로요.”

실리콘밸리=김성민 특파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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