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는 미얀마의 DJ가 될 수 있을까? [ 추천시글]

 

수치는 미얀마의 DJ가 될 수 있을까?

2021.06.08

 

지난 2월1일 미얀마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정정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쿠데타에 항거하는 민간인에 대한 군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5월말까지 800여 명이 사망했고, 5,000여 명이 체포 구금 상태이다. 사망자 중 50여 명은 어린이였다고 한다.

 

쿠데타는 군이 합법적인 정권을 찬탈하는 것이다. 버마의 2·1쿠데타는 민간과 군의 불안한 동거정부에서 군이 민간정부를 해체시킨 특이한 쿠데타이다. 민간정부가 군이 누려온 기득권을 축소하려하자 민간정부를 아예 축출해버린 것이다.

 

 

군에 의해 체포 구금된 사람 중 핵심은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다.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그는 1962년 네윈의 쿠데타 이래 군사독재 국가로 전락한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990년 야당인 국민민주주의연맹(NLD)을 이끌어 승리를 거둔 이래 2012년, 2015년, 작년 11월의 총선에서 잇달아 대승을 거둬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으나, 정부 내 군부세력을 뿌리 뽑지 못해 허무하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수치 여사는 군부의 눈엣가시였다. 그의 집권을 막기 위해 군부는 2008년 헌법 개정 때 2중 3중의 안전판을 만들어 놨다. 그 첫째가 59조의 대통령 자격 조항이고, 둘째가 436조의 군의 정치개입 조항이다. 이 두 조항으로 인해 수치 여사는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먼저 59조를 보면 부모 배우자 자녀 중 외국 국적자가 있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외세의 간섭을 배격한다는 이유에서다. 수치의 죽은 남편이 영국인이고, 둘 사이엔 영국 국적의 두 자녀가 있다. 이중으로 대통령 자격이 박탈된 상태이다.

 

 

436조는 상·하원의 의석 중 25%와 주의회와 지역의회 의석의 3분의 1은 자동적으로 군부에 할당하도록 하고 있다. 민간 정부가 버마의 종족분쟁이나 종교분쟁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헌법의 수호와 국체보존의 책임은 군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이 두 조항을 포함한 어떤 헌법조항의 개정도 상·하원 75%의 찬성으로 가능하다.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과반찬성으로 확정되나 이때의 과반수는 투표자 기준이 아니라 등록 유권자 기준이다.

 

군이 자동적으로 상·하원 의석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75%의 찬성 조건은 군이 동의하지 않는 개헌은 꿈도 꾸지 말라는 얘기다. 게다가 투표자 기준이 아니라 유권자 기준의 과반수 조건은 기권율을 감안할 때, 이 역시 의사결정의 일반원칙을 무시한 이중의 개헌저지 조항이다.

 

이 두 조항으로 인해 수치 여사는 의회에서 선출되는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 할 수 없었고, 직제에도 없는 ‘국가 고문’으로 활동해왔다. 수치 여사는 국가고문이 대통령보다 상위의 개념이라고 했으나, 군부는 총리급으로 격하해 불러왔다.

 

 

역대 선거에서 군의 정치개입의 철폐를 공약한 수치 여사로선 작년 총선 승리 이후 개헌 작업을 본격화할 계획이었다. 군은 선거부정을 이유로 재선거를 요구함으로써 민간정부의 개헌시도에 제동을 걸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의회 개원을 하루 앞두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은 수치 여사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면서 공직기밀법 위반혐의 외에 외국산 워키토키를 사용한 외제품 불법소지죄와 코로나 방역을 무시하고 국민들의 궐기를 촉구한 방역법 위반혐의를 적용하고 있다. 매우 구차한 혐의이다.

 

미얀마 국민의 저항은 무차별 진압으로 인명 피해의 위험이 커진 대규모 가두시위 대신 시민군에 의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는 상황이다. 군과 경찰에 대한 공격과 함께 군에 부역하는 민간인에 대한 암살로 번지고 있다. 미얀마가 독립이후 시달려온 종족분쟁을 넘어 내전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장기전에다 큰 희생이 뒤따를 전망이다.

 


미얀마는 여러모로 한국과 비교되는 나라이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의 5·16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당시 버마에서 네윈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26으로 18년 만에 막을 내렸으나 네윈은 박정희 정권보다 9년 더 집권한 뒤 1988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1인당 GDP 93달러의 나라를 타계하던 1979년에 1,773달러의 나라로 만들었고, 2019년 현재한국은 3만3,000달러의 나라가 됐다. 2020년 현재 미얀마의 1인당 GDP는 한국의 10·26 무렵과 비슷한 1,608달러에 불과하다. 네윈이 뿌려 놓은 독재의 뿌리가 걷히지 않은 탓이다.

 

미얀마의 빈곤은 군부가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경제 권력까지 장악함으로 빚어진 비능률이 가장 큰 원인이다. 명실공한 민간정부로의 탈바꿈이 없이는 미얀마 경제의 성장 여지는 적다. 미얀마 체제는 북한과 매우 닮은꼴이라는 점에서도 우리에겐 특별한 관심 대상이다.

 

미얀마 사태는 1980년 광주를 닮았다. 미얀마의 시민단체들이 한국의 특별한 지지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나, 많은 한국인들이 심정적인 연대를 보내고 있는 배경이다. 그러나 민주화는 경제적 토대가 갖춰질 때 완성된다. 5·18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5·18의 1차 열매는 1987년의 6·10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였고, 그것의 완성은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이었다. 직선제 개헌 때 3,510달러였던 한국의 1인당 GDP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던 해인 1997년엔 12,131달러였다.

 

미얀마의 현 정치 및 경제상황은 한국의 10·26사태 때와 흡사하다. 한국이 10·26으로부터 7년 뒤 1인당 GDP가 약 배로 늘어났을 때, 직선제를 쟁취했듯이 미얀마도 7년쯤 지나 현재의 GDP가 배로 늘어난다면 민주화의 1차 과실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났을 때 수치 여사(아니면 다른 어느 민간인)가 미얀마의 김대중이 된다면 미얀마의 민주화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의 궁극의 목표는 쿠데타를 걱정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5·18로 인해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되었듯이, 2·1 희생을 계기로 미얀마도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것의 대전제는 미얀마 정치와 경제에서 군대색깔을 빼는 개헌이 이뤄지는 것이다.

 

미얀마 사태에서 또 하나 유의할 것은 아웅산 수치 정권의 인권정책에 대한 서방 국가와 언론들의 과도한 비판에 대한 성찰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미얀마 군부의 무자비한 소수민족, 특히 로힝야 족 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소수민족 문제와 관련해 수치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자 다수 종족인 바마(Barma)족을 외면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행 헌법 아래에서 정치적 결정 권한에 제약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군부는 수치 여사의 이러한 난처한 입장을 그의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기회로 이용한 면이 있다. 그런 점을 감안했더라면 국제사회는 수치의 인권정책에 대한 비난보다 미얀마의 개헌문제에 더 깊은 관심과 우려를 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탄압의 장본인인 군부보다 수치에 대한 공격에 열중한 나머지 서방언론에선 수치를 군부와 한통속으로 간주하는 현상까지 나타났었다. 그점에서 좌초된 미얀마의 민주화는 군부의 계략에 말려든 서방 언론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본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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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주간한국,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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