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박자 부부’ 벌써 40년 [추천시글]

 

라이나전성기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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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박자 부부’ 벌써 40년

2021.05.19

 

아내는 클래식 음악을 싫어합니다. 나 때문입니다. 큰 애 업고 빽빽 우는 작은 아일 달래면서 집 안 청소하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대자로 누워 음악을 빵빵 틀어댔으니 그 소리가 곱게 들릴 리 만무했을 겁니다. 회사 직원들을 30여 명이나 집으로 불러대는 나에게 “이 뒤치다꺼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사장 그만두어라”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난 아내의 고충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술값으로 가계수표를 남발해 아내는 보일러 기름 값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데도 일요일엔 피곤하다며 잠만 자던 남편이었습니다. 자정이 넘어도 안 들어오는 이 인간, 오늘은 도대체 몇 시나 돼야 들어오나, 약이 올라 한밤중에 애기 둘러업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는 아내 얘기엔 내 가슴에도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랬던 내가 결혼 20주년을 바라보면서 철이 들었습니다. 부부가 뭔지, 남편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씩 눈이 뜨였습니다. 2000년 1월 1일, ‘가정경영연구소’ 문을 연 후 많은 부부와 가족들을 만나고 가족학을 공부하면서 ‘부부농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습니다. 자식농사를 잘 짓고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도 ‘부부농사’에 먼저 투자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강의와 방송을 통해서 내가 주장하고 가르쳤던 대로 살려고 노력한 덕분일까요, 아내도 과거에 비하면 내가 참 많이 변했음을 인정합니다. 신혼 초엔 길을 걷다가 아내가 내 손을 잡을라치면 남이 볼까봐 슬그머니 손을 빼던 무심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먼저 껴안고 뺨 비비고 치대서 귀찮을 때가 있답니다.

 

하지만 아내가 아주 싫어하진 않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다가가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일 중심으로 사는 나와, 집안 살림과 아이 키우는 일에만 전념했던 아내는 엇박자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13년 전부터 연구소 일을 도와주면서, 그리고 올해 결혼 40주년을 맞으며 박자가 조금씩 맞아가고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6년 전, 광화문에 있던 연구소를 양평으로 옮긴 후 아내와 함께 하는 취미도 늘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중미산 자연휴양림 숲길을 함께 산책하고 같이 영화 보고 국수나 청국장 한 그릇으로 데이트를 즐깁니다. 누구보다도 편하게 눈치 안 보고 즐길 수 있는 환상의 호흡을 맞추기까지 40년이 걸린 셈이지만...... 처음에 연구소를 양평으로 옮기자는 제안에 아내는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손에 흙 묻히는 일 따위는 절대 맡기지 않겠다고, 그리고 전세로 지내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서울로 돌아가자고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전세 계약이 끝나고 조그만 주택을 지어 연구소를 이전한 뒤론 아내가 텃밭 가꾸고 꽃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일 좀 그만 벌이라”고 말리는데도 아내는 상추, 쑥갓, 파, 부추, 옥수수부터 고추, 토마토, 오이, 가지, 호박, 수박, 비트, 그리고 남천, 담쟁이덩굴, 모란, 황매화, 조팝나무, 개나리 등을 계속 늘려나가는 통에 가끔 엇박자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24시간을 아내와 함께 붙어 있으면서도 아직 별문제 없이 잘 살고 있는 건, 뭐든지 아내와 대화하고 상의하며 조율해 나가는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사소한 일은 문제 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부부가 일을 같이 하면서 갈등이나 문제가 없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별문제가 없지만 부부 사이가 나빠지면 일이 제대로 안 되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집에 와서도 부부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부부의 공동 목표는 ‘함께 즐겁게 놀기’입니다. 예전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자고 하면 집을 고집했던 아내였습니다. 어디 맛있는 거라도 한 그릇 먹자고 해도 뚝딱 끓이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인데 뭐 하러 돈 쓰느냐며 집밥을 고집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내가 먼저 “제주도에서 한 달 한번 살아 보자, 꽃게 철인데 꽃게 먹으러 가자”고 청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영화라도 한 편 보자고 하면 무슨 영화를 그렇게 매일 보냐고, 집에서 하루에도 두세 편을 보는 나에게 핀잔을 주던 아내였는데 요즘은 먼저 영화 한 편 보자고 그러곤 또 한 편 더 보자는 때도 있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우리가 벌써 40년을 같이 산 거냐고, 아내는 웃으며 눈을 흘깁니다. 아들딸 결혼해서 잘살고 있고 장인과 시아버지, 할아버지도 돼봤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처음 결혼한 아내와 40년을 큰 문제 없이, 아직까지는 잘 살아내고 있으니 올 결혼기념일에는 엇박자 졸업 여행이라도 조촐하게 다녀올 참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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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한국사이버대 부총장, 한국건강가족실천운동본부 총재,

건강가정시민연대 공동대표 역임. 저서 '가족수업', '남편수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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