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국가, 기준인물 [추천시글]

카테고리 없음|2021. 5. 16. 16:46

 

기준국가, 기준인물

2021.05.14

 

“기준국가를 정해서 그 나라를 본받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며칠 전 출간된 ‘경제정책 어젠다 2022’라는 책에 나옵니다.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변양호와, 그의 행정고시 후배이자 재정경제부에서 함께 일했던 임종룡(전 금융위원장), 이석준(전 국무조정실장), 최상목(전 기획재정부 1차관), 김낙회(전 관세청장) 다섯 명이 썼습니다. 책의 부제(副題)는 ‘자유, 평등 그리고 공정’입니다. 내년 3월 대선에 출마할 사람이라면 누구도 외면해서는 안 될 이슈를 다룬 데다, 저자들 면면 또한 화려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복지를 위해서는 경기도지사 이재명이 주장해온 '기본소득제'보다는 소득에 따라 지원해주는 ‘부(負)의 소득세제’를 도입하는 게 이념상으로도 옳고, 재정부담도 훨씬 작다(연간 290조 원 대 170조 원)는 논지를 펴고 있습니다. 또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규제를 반드시 개혁해야 하고, 기업지배 구조를 바꿔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경청할 만한 국가방략(國家方略)입니다. 그중 나는 규제개혁 부분에 마음이 더 갑니다. 규제개혁으로 기업 활동이 자유로워지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소득이 높아져 생활이 풍요롭고 심성에 여유가 생겨난다는 믿음,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기준국가를 선정할 필요가 있다”는 아이디어는 박근혜 정부 말기 경제부총리로 내정되기도 했던 임종룡(법무법인 율촌 고문)이 규제개혁을 다루면서 제안했습니다. 이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제개혁을 추진했지만 결과는 보잘것없었다. 어떤 규제를 철폐하고, 어떤 규제를 유지 혹은 새로 도입해야 할 것인가 기준이 정권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정권 입맛대로 추진하는 규제개혁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규제개혁 기준이 필요하다. 한국이 벤치마킹할 수 있는 국가를 ‘기준국가’로 정하고 따라가자. 기준국가의 모든 규제 수준을 분석해 한국의 규제를 기준국가 수준으로 완화 또는 철폐해 기업 활동에 자유를 보장하자.”

 

이 제안 이전에 전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이 책 필자들의 선배인 박병원(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이 “다른 나라에서 허용되는 것은 모두 허용하자”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몇 가지 예를 들며 “중국도 허용하는 사업을 우리가 금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나라(기준국가)에서 허용하는 것은 우리도 모두 허용하자”는 임종룡의 제안은 이 제안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임종룡이 기준국가 후보로 꼽은 나라는 미국과 스웨덴입니다. 세계은행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의 기업환경 평가, 경쟁력 평가 등에서 10위 안에 든 국가 중 한국과 경제 형태가 비슷한 나라를 찾았더니 이 두 나라가 남았다는 거지요. 만일 여론을 물어본다면 미국보다는 스웨덴을 본받자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복지제도가 좋아 다수의 국민들이 ‘욜로 라이프(Yolo Life,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자’)를 누리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히는 데다, 하루걸러 총기 난사와 인종차별-요즘에는 아시아인만 노린 ‘묻지 마 폭행’-같은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이 벌어지는 미국보다는 안정된 국가라는 느낌 때문입니다.

 

정치적 부패가 없다는 것도 스웨덴을 본받을 만한 이유일 겁니다. 국제투명성기구가 올 1월 발표한 2020년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 조사에서 스웨덴은 88점으로 180개국 중 3위였습니다. 한국은 33위로 역대 가장 높은 순위에 올랐지만 점수는 61점에 불과하니 스웨덴과는 격차가 한참 벌어집니다. 실제로 스웨덴 국회의원들은 승용차 대신자 자전거로 등원한다거나 커피 한 잔도 자기 돈으로 사서 마신다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나왔습니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부패가 없기 때문에 스웨덴이 복지천국이 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정치가 부패하고 공직자들이 썩은 나라에서는 복지재원에 누수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복지재원을 직접 잘라먹는 것뿐만 아니라 비효율적 집행도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니 스웨덴을 본받으려면 한국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먼저 스웨덴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2022 경제정책 어젠다’의 대표 저자인 변양호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새로운 정책 도입에 공무원들의 반발이 클 거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부의 소득세’에 반발이 집중될 거라고 걱정했는데, 이 제도는 기존 복지제도를 모두 폐지하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처별로 나눠진 현행 복지 담당 조직이 사라지고 공무원들도 할 일이 없어지니 반발이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부의 소득세제가 도입되면 공무원 연금제도도 폐지해야 할 텐데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한 공무원들의 반발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준국가를 정할 때 기준인물도 정해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보고 따르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준인물은 외국에서 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번 장관 인사청문회를 잡음 없이, 야당의 칭찬 속에 통과한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국회에서 거대 여당의 거칠고 무례하며 황당한 집중공격을 무림의 절대고수처럼 조용히 '한 줄기 장풍'을 날려 일순에 잠잠하게 만든 감사원장 같은 이도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은 드물 뿐이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소신 있고 청렴한 사람을 찾아서 보호하고 키우면 기준인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늦으면 멸종하겠지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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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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