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가격이 이상해진 이유[추천시글]

 

 

에어컨 가격이 이상해진 이유

2021.04.29

 

웃으면 복이 와요’를 중년 이상이면 아마 다 기억할 겁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배삼용, 구봉서, 서영춘, 이기동 등 당시 기라성 같은 코미디언을 아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릴지 모르지만, 적어도 필자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오는 즐겁고 고마운 분들입니다. 일요일 저녁, 리모컨 없이 손으로 동그란 채널을 돌려서 보는 로터리 TV 앞에 앉아서 매주 별반 다를 게 없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그 코미디가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깔깔거리며 웃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중에는 ‘김 수한무 두루미와 거북이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이라는 길고 긴 이름이 나오는 희대의 명작도 있었습니다만, 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공짜 국수’였습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자 음식점 주인(구봉서)이 가게 문에 ‘국수 공짜’라고 써 붙입니다. 몇몇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들이 공짜 국수를 시켜 먹고 가게 문을 나가려 하자 주인이 뒷덜미를 잡고는 “돈을 내셔야죠.”라고 말합니다. “공짜라면서요?”라고 손님이 되묻자, 주인은 “국수는 공짠데, 나무젓가락 값은 내셔야죠.”라며 나무젓가락 하나 값으로 국수 값을 다 받아냅니다. 문 앞에서 이 모습을 본 또 다른 사람(이기동)이 ‘옳거니’ 하면서 음식점에 들어갑니다. 국수가 나오자, 주머니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내서 국수를 먹기 시작합니다. 함께 나온 단무지까지 남김없이 국수를 다 먹고 의기양양하게 가게를 나가려는 순간, 구봉서 아저씨가 이기동 아저씨의 땅땅한 뒷덜미를 잡습니다. “단무지 값은 내셔야지…” 순간 이기동 아저씨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내고 나간 후, 오기가 발동한 이기동 아저씨는 다시 가게로 들어와서 공짜 국수를 시켜 먹습니다. 이번에는 단무지를 먹지 않고 국수만 먹습니다. 다 먹고 나서 목이 말랐는지 엽차 한 잔을 마시는데 이게 또 화근이 됩니다. 이번에는 엽차 값으로 국수 값을 내게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쑤시개 값으로 국수 값을 내고, 냅킨 값으로 국수 값을 내고 마지막으로 자리 값으로 국수 값을 내게 합니다.

 

 

거의 50년이 돼가는 코미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이미 고인이 되신 두 코미디언의 명연기도 큰 영향이 있었지만,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이 어린 마음에 너무 어처구니없어서였습니다.

 

얼마 전, 아이들 방에 설치한 에어컨이 낡아서 바꿔주려고 인터넷 최저가 검색을 했습니다. 절전도 된다는 최신 기종이 생각보다 싸게 나왔길래 전화를 해 봤습니다. 상담원이 “어떤 제품 보셨나요?” 하고 묻길래, “OO모델인데, OO에 나왔던데요?”라고 얘기하자, “아 그 가격이면 실외기는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에요.”라고 답을 합니다. ‘아니, 내가 무슨 선풍기를 사는 것도 아니고 실외기를 빼면 에어컨은 무용지물인데 실외기를 뺀 가격이라니! 이건 모니터 뺀 TV를 판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는 거 아냐? 이 사람들 냉장고 팔면서 냉동칸은 따로 사야 한다고 할 사람들이네!’라고 생각하면서 바로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탁 끊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인터넷 검색을 좀 더 해봤습니다. 조금 싸게 내놓은 제품들의 상세정보를 펼쳐보니 맨 아래쪽에 추가설치비 명목이 있었습니다. 실외기 앵글을 새로 다는 것도 아닌데 기존 앵글 설치비 7만 원, 실외기 전원선 1만 원, 2층 이상 난간 작업 위험수당 3만 원, 기존 에어컨 철거비 5만 원, 매립배관일 경우 배관 청소비 10만 원, 배관 용접비 1만 원, 배수 펌프 10만 원, 냉매 가스 보충 5만 원의 비용을 다 지불한다고 가정하니 무려 41만 원이 더 듭니다. 게다가 위에 명시한 것 말고도 타공이나, 천정 작업비, 추가 배관, 동(구리) 배관으로 교체 등등 덤터기 씌울 것들은 차고 넘쳐서 멋모르고 덜컥 구입했다가는 속된 말로 ‘호갱이’가 되기 쉬워보였습니다. 실제로 후기를 읽으니, “에어컨 35만원에 사서 설치비 25만원 들었습니다.”라는 한숨 섞인 반응들이 꽤 있었습니다.

 

필자가 7년 전에 에어컨을 설치할 때만 해도, 추가 배관 정도만 비용이 더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길래 시장이 이렇게 아사리판이 되었을까요? 직접적인 원인은 인터넷 최저가가 우선 노출되는 온라인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일단 싸게 올려야 눈에 띄니까 실외기는 뺀 가격을 올리고 문의가 오면 실외기 가격을 따로 제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설치하면서 이 구실 저 구실로 비용을 청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직접적인 원인보다 더 큰 문제는 어느덧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서로서로 못 뜯어 먹어서 안달이 난 것 같은 풍토입니다. 어찌된 게 이 나라의 구석구석이 해 처먹지 못하는 사람들만 바보가 돼가고 있습니다. 아빠 찬스로 대학 가고, 직장도 얻고, 부동산 투기로 불명예 퇴진해도 어영부영 금배지를 다는 세상입니다. 존경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 이렇게 비난은 잠깐 이익은 영원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시니 도덕이니, 양심이니 따질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 게다가 LH 직원들의 땅투기는 그깟 에어컨 설치비 몇 십만 원 부당 청구에 비할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에어컨 설치비 몇 십만 원 부당 청구에 더 가슴이 아픕니다. 과거에는 윗물이 썩어도 아래에는 청정한 맑은 물이 흘러서 이 사회를 지탱했습니다. 그때는 윗물이 썩은 걸 아랫물이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디어의 발달로 그걸 누구나 아는 세상이 되었고, 그 결과 아랫물이 윗물을 닮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사회에 그러한 예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서 속상합니다. 상황이 이런데, 윗물은 여전히 아랫물의 속사정에 깜깜하다는 것에 절망감까지 느낍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 코미디를 보던 시대는 그나마 염치를 아는 시대였습니다. 그때는 끼니를 굶는 사람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더 작은 집에 많은 가족이 모여 살았고, 자동차는 동네에 몇 대 있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지금보다 품위를 소중하게 여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려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요? 에어컨 주문하려다 갑자기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슬픈 하소연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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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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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BECA 석사

현재 SBS아나운서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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