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릴 듯 말 듯한 매혹스러운 미소, 백작약 [추천시글]

 

 

열릴 듯 말 듯한 매혹스러운 미소, 백작약

2021.04.21

 

백작약 (작약과), 학명 Paeonia japonica

 

완연한 봄 날씨에 꽃은 다투어 피고 있습니다.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데도 벚꽃 명소의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벚꽃 구경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봄이 가고 있습니다. 계절도, 벚꽃 구경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기한 현상을 맞고 있습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서울 벚꽃 개화 시기는 1922년 서울에서 벚꽃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 100년 사이 가장 빠른 시기에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올해 2~3월 평균기온이 평년보다 높고, 일조시간도 평년보다 많았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 때문에 벚꽃만이 아니라 다른 꽃들도 다투어 피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일 년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집밖에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마스크를 썼다 할지라도 장소, 시간, 인원수 등 제한으로 예전과 같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동면하듯 긴 겨울을 집에 갇혀 지냈고, 벚꽃이 피었어도 벚꽃 명소의 출입을 통제하니 겨울 동안 꽃구경 한 번 못해 눈이 고픈 꽃쟁이들의 아쉬움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겨우겨우 기회를 만들어 멀리 남쪽의 전북 완주에 있는 천등산 일대의 무명계곡에 꽃이 좋다는 풍문 따라 바람도 쐴 겸 꽃 탐방을 나섰습니다. 계절이 빨라진 탓에 남녘의 산하는 이미 예전 오월의 담록빛 세상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대둔산 자락을 돌아가는데 산기슭에 자생하고 있는 잔털벚나무꽃이 곳곳에 피어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피어 있는 연초록 숲속의 산벚꽃이 마치 수(繡)틀에 매화꽃 수를 놓은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목적지인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 도착하여 마을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초입부터 숲속 계곡의 꽃들이 심상치 않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산철쭉이 순서도, 질서도 없이 마구잡이로 동시에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야생화의 꽃 피는 시기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발걸음 스치는 길섶에도 제비꽃, 개별꽃, 현호색, 족두리풀, 홀아비꽃대 등 봄꽃이 행여 늦을세라 서두르는 듯했습니다. 시기적으로 한참 더 있어야 필 꽃들인데...

 

상산나무, 비목나무의 강렬하고 상큼한 향이 코끝에 스칩니다. 아기자기하게 피어나는 발밑의 키 작은 꽃들을 살피느라 허리 구부리고, 무릎 꿇어가며 숲속을 뒤지는데 불을 켠 듯 백설같은 큼직한 꽃송이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숨마저 막힐 듯한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수 그루의 백작약꽃을 만난 것입니다. 심마니의 ‘심 봤다.’ 함성이 터져 나올 듯한 전율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요즈음은 약초꾼이 아니어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하도 많고, 나물이나 약초를 보면 불문곡직하고 캐가는 사람이 많아 귀한 꽃이나 약재가 수난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함에도 높은 산도 아닌 야산 계곡에 수 그루의 백작약이 건재한 상태로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곳이 선녀봉 자락이라서 마을 주민들 심성이 착해서일까? 최근에는 약효가 좋다고 알려져서 무분별한 불법 채취로 산삼보다도 더 구하기 어렵다는 야생의 백작약이 튼실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있으니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열릴 듯 말 듯한 매혹스러운 미소

 

백작약은 깊은 산지에서 자라는 진귀한 야생화입니다. 꽃이 크고 탐스러워서 함박꽃이라고도 합니다. 꽃은 5~6월에 흰색으로 피고 원줄기 끝에 1개씩 달립니다. 관상용으로 많이 심기도 합니다. 약용으로도 쓰입니다. 뿌리를 진통, 경련 완화, 부인병에 사용하는데 혈(血)을 보(補)해주고 신경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꽃말은 ‘수줍음’입니다. 꽃이 활짝 열리는 재배종 작약과 달리 열릴 듯 말 듯 반쯤만 피는 꽃이라서 붙여진 꽃말인가 싶습니다. 눈부시게 하얀 아름다운 꽃, 배시시 웃는 수줍은 산골 아씨와 같은 미소가 매혹적입니다. 나폴레옹을 고혹(蠱惑)스럽게 했던 신비한 모나리자의 미소, 정숙함과 요염함 그리고 헌신적 다정함과 뇌쇄적 관능미를 동시에 내비치는 그 미소처럼, 필 듯 말 듯한 백작약의 꽃을 보면 꽃사랑 보호심과 차지하고 싶은 탐욕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선녀를 찾는 나무꾼이 이를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모셔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크게 일었습니다.

 

백작약은 깊은 산에서 자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꽃이 되었습니다. 꽃이 크고 화려해서 쉽게 눈에 띄고 약효가 좋다 해서 보이는 대로 불법 채취한 탓입니다. 아무리 꽃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귀한 꽃일수록 함부로 손을 대거나 옮겨 심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 꽃이 희귀한 꽃이 되었겠는가? 그만큼 자라는 환경이 까다로워서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못한 탓입니다. 그 꽃을 옮겨 보통의 곳에 심으면 필연적으로 죽기 마련입니다. 귀한 것은 귀한 대로 대우해 줘야지 혼자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꼭 탐이 난다면, 그나마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만, 씨를 받아 심어보든지 아니면 재배용으로 개량한 품종을 꽃집에서 사다 심어야 합니다. 야생의 식물체를 채취해서 직접 옮겨 심는 것은 바로 죽게 하는 짓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고운 꽃을 보는 마음은 한량없이 기뻤지만, 근심 또한 커졌습니다. 혹여 누가 캐가면 어떡하나? 사실 이 칼럼을 쓰는 것조차 세상에 알린 것 같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귀한 백작약의 꽃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꽃을 만난 즐거움과 행여 훼손될까 염려하는 마음이 쓸데없는 걱정이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백작약

 

숲 바람 살랑대는 외진 숲속

열릴 듯 말 듯

반긴 듯 새침한 듯

수줍음에 겨운 미소.

누굴 위해 저리도 곱게

매혹스러운 웃음으로 하늘 우러르는가.

 

 

눈부신 봄 햇살이

산산이 부서지는 하얀 꽃판

꽃그늘 숲속에 불을 밝힌다.

 

붕정만리 창공을 날다가

외로움에 지쳐

잠시 내리 앉은 선학(仙鶴)의 자태런가.

불을 현 듯 뭇꽃 중에 돋보이니

선녀 찾는 나무꾼이 탐을 낼까 두렵다.

 

(2021. 4. 10 완주군 선녀봉 자락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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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가 있다.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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