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여학생과 뻥튀기 선물 [추천시글]

 

펜팔여학생과 뻥튀기 선물

2021.04.16

 

학생 수 감소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는 업종이 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보문고가 전국적인 체인망으로 서점업계의 공룡이 되면서 지방 서점이 눈에 띄도록 줄어들었습니다. 요즈음 군내에 있는 소읍 지역에는 한 개 정도 서점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살던 면소재지에도 서점이 세 곳이나, 있었습니다. 농촌 면소재지에 있는 서점이라 모두 문구점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벽에 붙어 있는 책장에는 소설이며 시집 등이 꽂혀 있고 중앙에는 문구 판매대가 있었습니다.

 

 

유리창에는 그 시절 학생들을 위한 전문잡지 ‘학원’의 홍보용 포스터며, 동아전과나, 표준전과 표지를 확대한 홍보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장날에도 난전을 펴 놓고 책을 파는 할아버지들이 두 분이나 오셨습니다.

 

난전에 펼쳐 놓은 책은 서점에서 파는 책들과 다르게 노끈으로 묶은 책들이었습니다. ‘천자문’을 비롯해서, 얇은 표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장화홍련전’,‘심청전’ 같은 옛날 책들을 팔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면사무소 옆에 있는 학원에서 ‘학원’ 잡지 과월호를 싸게 샀습니다. 꽤 두꺼운 잡지였는데 정독을 하다 보니 밤 두 시쯤 되었습니다. 너무 쉽게 읽은 것 같아서 아껴서 읽을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에 페이지를 들척이다가 독자란에 시선이 갔습니다.

 

학생들이 올린 시와 몇 줄짜리 낙서에는 모두 주소가 나와 있었습니다. 개인정보에서 주소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집 번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잠은 오지 않고 해서 짤막한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시를 완성해서 편지봉투에 넣을 때까지만 해도 훗날 펜팔 편지가 무더기로 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때는 편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편지지와 편지봉투 우표 몇 장 정도는 갖고 있었습니다. 생각난 김에 편지봉투에 우표까지 붙여 놓고 잠이 들었습니다.

 

학원사에 투고한 시 주제는 ‘고독’이었던 거로 기억이 납니다. 요즘은 듣기 어려운 낱말들이지만 그때는 ‘고독’, ‘우정’, ‘벗’,‘삶’ 같은 낱말들이 낙서에 단골로 등장했습니다. 가까운 친구들하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으면, 사진사가 필름에 ‘우정을 간직하며’ 라든지 ‘영원한 벗들’이라는 문구를 적어 현상해주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를 둔 친구들은 가을 수확을 돕느라 학교가 파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농사를 짓지 않아서, 특별하게 할 일도 없이 학교에서 빈둥거리다 느지막하게 집으로 갔습니다.

 

들마루에 이름을 처음 보는 여학생이 보낸 편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여학생이 제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까막까막 졸다가 눈이 번쩍 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편지봉투를 뜯는 손가락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여학생은 ‘학원’에 게재가 된 제 시를 읽었노라며 앞으로 계속 편지를 주고받자는 내용을 썼습니다.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노트를 꺼내 들고 방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거의 단숨에 답장을 써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도롯가에 있는 우체통에 넣으면 편지가 하루 늦게 갈 것 같아서 우체국까지 뛰어갔습니다. 우체국 안에 있는 편지함에 편지를 넣고 나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난생처음으로 도시에 사는 여학생에게서 받은 편지를 수십 번이나 읽었습니다.

 

‘창문 밖에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슬프게 들리는 밤입니다.’라는 글로 시작되는 편지 내용은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을 떨리게 했습니다.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 글씨는 또 얼마나 예쁜지, 손에 향수를 바르고 편지를 썼는지 편지지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튿날은 무려 열 통이 넘는 편지가 배달됐습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열 통이 넘는 편지는 모두 서울이며 부산, 대구 같은 도시에서 보낸 것들이었습니다. 어머니도 무슨 편지가 그렇게 많이 왔냐며 놀라워하셨습니다. 장황하게 어머니에게 펜팔 편지들이 오게 된 사연을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학원 잡지에 시를 투고했더니 온 편지들이라고 대충 대답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가위를 찾아서 편지를 한 장씩 개봉해 읽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열 통 모두 답장을 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글씨가 예쁘고, 내용이 좋은 세 통을 골라서 답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삼 일째부터는 편지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때는 스무 통이 넘는 편지가 오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교실 안에서 편지를 받기 위해 야단법석이 난 건 당연했습니다.

 

펜팔 편지는 고등학교 3학년 때도 가끔 배달이 됐습니다. 이미 열기는 식었지만, 성의가 고마워서 답장을 해 줬습니다. 300통이 넘게 받은 편지 중에 제일 처음으로 보낸 여학생과 가장 늦게까지 펜팔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등포에서 이미 사회인이 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거의 2년 동안 펜팔을 하면서, 그 흔한 사진 한 장 교환하지 않았으나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지 않았습니다. 영등포역 근처에 있는 분식센터에 들어가니까 신기하게도 DJ가 음악을 틀어주고 있었습니다.

 

빈자리가 없을 만큼 손님이 꽉 찬 데다 음악 소리가 시끄러워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여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기차 시간이 다 돼가서 역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헤어질 때 뻥튀기를 한 봉지 선물로 안겨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린애도 아닌 숙녀에게 뻥튀기를 선물한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뻥튀기를 선물로 줬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됩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은행에 다니면서 몇 번 그녀를 더 만났습니다. 편지를 100여 통 넘게 주고받았는데 너무 싱겁게 헤어졌습니다.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은행 마감이 맞지 않아서 펑크를 냈습니다. 다방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황이라서 굉장히 미안했었는데 이별 편지가 왔습니다. 사과 편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편지하기가 더 미안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 펜팔 편지를 쓰던 실력은 군대에 가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선임들의 연애편지나, 펜팔 편지를 도맡아서 대필해 준 덕분에 이등병 때부터 여러 가지 득을 크게 봤습니다. 그중에 점호 끝난 후에 선임들과 숨어서 소주병을 기울일 수 있는 혜택이 제일 좋았습니다.

 

페이스북에서 60대 여자들이 여고생들처럼 옆으로 나란히 서서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을 봤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나이를 먹어도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잊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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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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