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는 나의 힘"

패러디는 나의 힘

2021.03.16

 

지난해 여름 '진인(塵人) 조은산‘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청원 글 ‘시무7조’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며 그렇잖아도 뜨거운 여름을 더더욱 달구었죠. 고려시대 문신 최승로(崔承老)가 건의한 시무책(時務策) 형식의 상소문에 전, 현직 장관과 정치인의 이름을 끼워 넣은 언어유희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요즘 한국토지주택공사(LH) 토지 투기 의혹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습니다. 국민 모두의 공분을 사고 있는 사안을 두고 여야가 서로 이로움을 좇아 책임 공방을 하는 터에 패러디도 ‘당근’ 나돌고 있습니다. ‘LH' 영어 글자와 우리글 단어 ‘내’의 모양이 비슷한 데 착안해 영화 <내부자들>에 그려진 힘 있는 자들의 뒷거래를 되비춘다든가, 밀레의 소박한 전원풍 그림 <이삭줍기>에 ‘묘목심기’라는 제목을 달아 빗댄다든지...

 

 

본디 ‘패러디(parody)’는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을 가리킵니다. ‘다른 노래에 병행하는 노래란 뜻의 그리스어 파로데이아(parodeia)에서 유래한 패러디는 단순히 다른 작품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폭로하는 것이니,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먼저다’라고도 되어 있죠. ㅡ<네이버지식백과>

 

사전적 정의나 용례는 그렇다 치고, 패러디를 잘만 하면 단번에 눈길을 끌고 재치와 재미로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패러디는 원문의 참뜻과 연결이 되거나 확장하는 새로운 소통방식입니다. 희극성만을 강조해 지나치게 격이 떨어져 원문을 훼손해서는 안 되겠지만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필자가 만들어본 이런저런 패러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패러디는 나의 것, 패러디는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2002, 감독 박찬욱)>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영화의 내용은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였습니다. 착실한 남자와 자유분방한 여자가 만납니다. 그러다 여자가 로맨티스트 성향의 다른 남자에게 끌리고 원래의 순진한 남자는 질투를 느껴 절망감에 사로잡힌다는 통속적인 흐름입니다. 질투에 일상을 내맡긴 남자가 어떻게 되는지, 그러니까 질투의 속성이 어떻다는 것인지에 대한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고 모호하게 끝납니다.

 

영화의 주제는, 그다지 설득력은 없지만, 어떤 대상 또는 계층을 향한 질투나 위화감이 살아나가는 힘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질투에는 반복성이 있어 습관이 되고, 나도 모르게 밴 습관이 삶의 어려운 국면을 극복할 역설적인 힘이 될 수 있음을 말하려 한 것인지도. 어쨌거나 폭력을 부르는 ‘복수는 나의 힘’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고요? 보나마나 막장 느와르일 것이에요.

 

영화는 기형도(1960~1989)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서 제목을 빌려온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네요. 내가 살아갈 힘은 ‘질투’라고.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나아가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자를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나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에서는 타자에 대한 질투나 위화감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자문했음 직한 질문입니다.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거나 답변을 못한 질문이기도 할 테고요. 어쨌거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요? ‘힘에의 의지’?(니체) ‘표상을 좇아서’(쇼펜하우어) ‘불안 때문에’?(키에르케고르), ‘그냥 세상에 던져졌으니까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하이데거)

 

​어쩌면 ‘나도 몰라’나 아니면 ‘이유도 없고, 이유가 없으니 대책도 없이’나 ‘어떻든 살아야 해서’가 차라리 그럴듯해 보이는군요. 누군가는 ‘신의 섭리’를 내세워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계획에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한편에선 떨떠름하게 말할 거예요. 그런 이야기는 세상을 모르는 배부른 자들이나 하는 이야기니 ‘그냥 대충 살아’라고. 우리 옛시조 한 편이 생각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고려 말 이성계의 아들인 비선(秘線) 실세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마음을 떠보려 한 <하여가(何如歌)>입니다 요즘 식으로 간추리면, 그러지 않아도 힘든 세상 “대충 살자!” 정도가 될 것이에요. 이런 제의를 받는다면, 요즘 보통 사람 그 누군들 <단심가(丹心歌>의 정몽주처럼 결연한 충정과 의기를 떨칠 수 있으려나요? “나의 길을 가련다!(My Way)"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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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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