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듣겠습니다.” 임철순

“이제 그만 듣겠습니다.”

2021.03.15

 

일상의 대화나 비대면 온라인 공간에서의 접촉을 마무리할 때 상대방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요? 대화든 토론이든 협상이든 듣는 이가 불쾌해지지 않도록 원만하게 끝을 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대화의 소재와 내용에 따라 어법과 말투가 달라지는 건 당연하지만, 민감하거나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는 경우라도 배려와 품격을 갖춰야 합니다.

 

방송 인터뷰 거북한 마무리

요즘 TV나 라디오의 앵커나 사회자가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뉴스 관련자나 그 분야 전문가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 쓰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제 시간이 다 돼 인터뷰 끝내야 하니 그만 이야기하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앵커는 “오늘 저희가 준비한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말을 잘 쓰고 있습니다. 전에는 뭐라고 하면서 프로그램을 끝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이 방송, 저 방송에서 자주 듣게 되는 멘트입니다.

 

 

그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는데, "여기까지 듣겠다"는 말에는 내가 당사자가 아닌데도 거부감이 생깁니다. 사실은 말하고 싶은 게 더 있고 시청자나 청취자가 알아야 할 게 더 있는데도 입을 닫으라고 하는 것 같은 인상입니다. 상대의 표정과 몸짓을 알 수 없는 비대면 온라인 인터뷰의 경우에 이 말을 더 많이 합니다. 시간이 다 됐다는 걸 눈치나 분위기로 알려주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단톡방의 불유쾌한 입씨름

최근 한 대학 동창 단톡방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A가 '미스트롯2'에서 진으로 뽑힌 제주 주부 양지은을 칭찬하는 글을 퍼다 올렸습니다. 준결승에 못 오르고 탈락했다가 우승하기까지의 과정도 기적의 드라마이지만 품성과 태도가 참 좋으니 그의 노래를 한번 들어보라는 권유였습니다.

 

​그러자 B가 양지은이 마지막에 ‘인생곡’으로 부른 ‘붓’이라는 노래가 사실은 대한민국 70년을 부정하는 가사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것도 자기가 쓴 게 아니라 퍼온 글인데, “붓을 달라, 붓으로 백두산 천지를 먹물 삼아 역사를 다시 쓰자”고 주장한 무시무시한 가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대중가요, 너마저 빨간 물이 들었구나”라고 개탄했습니다.

 

이에 대해 C가 “지나치게 엮는 거 같은데, 생각 없이 퍼오지 마시기를…”이라고 댓글을 달았고, B는 “엮는 건 아닌데 가사를 잘 보기 바랍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C는 “봤습니다. 그냥 들으시길”, “이런 글 쓴 사람이 누군지부터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의도가 나올 수 있을 거 같은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B가 “오케이. 거기까지!”하고 말을 막았습니다. 조마조마 지켜보던 친구들은 더 이상 입씨름이 번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안심을 했지만, 그 이후 단톡방이 조용 어색 썰렁해졌습니다.

 

 

대통령의 민망한 페이스북

문재인 대통령이 경남 양산에 마련 중인 사저에 대해 야당이 공격하자 “좀스럽다”며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선거 시기라 이해하지만, 그 정도 하시지요. 좀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대통령 돈으로 땅을 사서 건축하지만, 경호 시설과 결합되기 때문에 대통령은 살기만 할 뿐 처분할 수도 없는 땅이지요”라고 페이스북에 썼습니다.

 

앞서 국민의힘은 “대통령 사저 부지의 농지를 원상복구해 농민에게 돌려주라”고 주장했습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 3기 신도시 건설이 예정된 농지를 구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문 대통령 사저도 문제 삼고 나섰습니다. “영농인이 아니면서 농지를 구입한 농지법 위반 문제가 해명되지 않으면 BH(청와대)도 LH와 다르지 않다는 소문은 굳어질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경남 양산이 지역구인 윤영석 의원은 SNS 글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농지 566평을 취득한 뒤 1년도 되지 않아 대지로 전용해 1,100평의 땅에 집을 짓는 것은 대통령 특권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문 대통령이 이렇게 발끈한 것은 이례적입니다. 참모들이 말리는데도 직접 글을 썼다는 말도 들리던데, 그만큼 요즘 분위기가 나쁘기 때문이겠지요. 이에 대해 유승민 전 의원은 “허탈과 분노를 달래줄 대통령의 공감, 사과, 위로의 말을 기대한 국민들에게 보낸 메시지가 고작 본인 소유 부지에 대한 원색적 분노의 표출인가”라고 개탄했습니다. 그야말로 실망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든 누구든 이런 배제의 언어, 공격적 언사는 삼갔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말은 최대한 절제되고 메시지가 정제돼야 합니다. 특히 SNS를 이용한 글쓰기는 파장이 크고, 한번 내보내면 내용이 취소되지도 않으니 늘 조심해야 합니다. 자고 나면 벌어지는 논란과,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천박한 말싸움, 말꼬리 잡기에 그만 좀 시달렸으면 좋겠습니다. 나야말로 “이제 그만 듣겠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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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미디어SR 주필,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 ‘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노래도 늙는구나’,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자유칼럼그룹. webmaster@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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