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참상을 기억하게 한 공로'[이성낙]

'나치 참상을 기억하게 한 공로'

2021.03.04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슈타인마이어(Frank-Walter Steinmeier, 1956~ )는 지난 연말에 아주 특별한 공로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상징물이기도 한 ‘Das Konzentrationlager Auschwitz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두 명의 생존자에게 독일연방공화국 최고 훈장을 수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최상급 훈장을 수여하는 이유와 방법, 그 모든 과정이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수상자 라스커발피시(Anita Lasker-Wallfisch, 1925~ ) 여사는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수용됩니다. 소녀는 마침 당시 수용소가 운영하는 ‘소녀 오케스트라(Maedchenorchestra)’에서 첼리스트(Cellist)로 활동하며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44년 11월 영국군에 의해 석방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영국에 정착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라스커발피시는 나치의 각종 만행을 고발하는 군사재판 및 행사에 증인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나치 독일의 악행을 규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녀는 특히 각종 언론 매체에 기고한 글과 인터뷰를 통해 나치 만행을 생생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꾸준한 공을 인정받아 라스커발피시는 2018년 1월 31일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사당에서 전통적으로 열리는 ‘내셔널 사회주의(나치)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 모임’에 특별 연사로 초청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홀로코스트에서 경험했던 참상은 물론, 근래 유럽 사회에서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반유대인 정서’를 강하게 규탄했습니다. (사진, ‘따뜻한 안내’)



또 한 사람의 수상자 크레츠(Henriette Kretz, 1934~ ) 여사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범하자 가족과 함께 큰 수난을 겪었습니다. 불과 다섯 살이던 어린 소녀는 눈앞에서 부모가 처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고, 평생을 그 악몽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크레츠는 당시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보육원의 보살핌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벨기에의 안트베르펜(Antwerpen)에 정착한 크레츠는 ‘폴란드계 홀로코스트 출신 고아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각종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 및 저술활동을 통해 나치의 만행을 고발해왔습니다.

독일 대통령은 두 사람에게 공로 훈장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이유를 밝혔습니다. “귀하는 매우 특별하고 인상 깊은 강연과 인터뷰를 통해 나치가 유럽의 유대인에게 저질렀던 민족 말살을 상기하게 하면서 다가오는 세대에게도 이를 기억하게끔 했습니다(Mit Ihren zutieftst eindringlichen Reden und Ihren Interviews halten Sie die Erinnerung an den Voelkermord an den Juden Europas auch fuer die nachfolgenden Generationen wach).”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나치 참상을 상기하고 기억하게 한 공로'를 인정해 두 사람에게 독일 최고의 ‘국가공로 훈장’을 수여한 것입니다. (2020.12.18).

유럽의 한 정치인이 보여준, 이처럼 정직하고 무거운 역사 인식은 필자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열렸던 ‘뉘른베르크 전범 군사재판(Nuernberger Prozesse)’ 75주년을 즈음해 이를 ‘세계사적으로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정의하며, 오늘날 ‘민족 형벌권(刑罰權)의 기초(Grundlagen fuer heutiges Voelkerstrafrecht)’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2020.11.20).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역사적 언행에 무게가 더해지는 이유입니다.

 



특히 작금의 독일 사회에서 각 지방 자치단체는 물론 연방의회에 극우 세력이 존재감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올곧은 역사 인식을 더욱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두 수상자에게 훈장을 주는 사유를 친필로 써서 서한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관례대로라면 두 수훈자를 대통령궁으로 초빙해야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고령인 96세 라스커발피시와 87세인 크레츠를 배려한 것입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따듯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현지 언론에서도 ‘친필’이라는 사실을 크게 부각했습니다. 한 정치인의 강하면서도 온기 있는 언행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치 참상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이바지한 공로”라는 글귀가 독일과 이웃 여러 나라에 큰 울림으로 전해진 것은, 다름 아닌 한 국가원수의 진심 어린 ‘아름다운 사죄’ 때문일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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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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