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이 할아버지 세뱃돈 [한만수]




www.freecolumn.co.kr

수경이 할아버지 세뱃돈

2021.02.22


예전에는 대부분 동네 가운데에 있는 공동우물을 사용했습니다. 마당이 넓은 부잣집에는 우물이 있거나, 펌프 시설이 되어 있었습니다. 공동우물이 없는 산촌에서는 계곡에서 마을로 흘러내려오는 물을 퍼다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고모님이 산촌으로 시집을 가셨습니다. 마당 앞에가 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제법 큰 냇가가 있는 집입니다. 냇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냇물에 빨래를 하고, 그 냇물로 식수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강가로 소풍을 가서 놀다 목이 마르면 강물을 손바닥으로 움켜 마시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양조장을 ‘술도가’라 불렀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도갓집’은 동네에서 마당이 가장 넓었습니다. 마당 안에는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가 있고 마당에는 너무 깊어서 물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담장 앞에는 늘 여름이면 모란이며 작약이 탐스럽게 피어났습니다. 제법 큰 석류나무와 감나무도 몇 그루 있었습니다.

제가 2014년에 출간을 대하장편소설 금강'(전15권)의 지주 이병호의 집이 ‘도갓집’의 구조를 차용해서 쓴 것입니다. 도갓집은 산기슭에 있어서 누마루에 오르지 않아도 동네 앞 들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들판 한가운데는 논 10마지기가 한 다랑이였습니다. 모내기를 할 때는 수십 명이 일렬로 서서 모를 심는 광경이 구경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도갓집에는 대문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 우물이 있어서 주변 이웃들은 담을 빙 돌아서 우물물을 길지 않아도 되는 구조였습니다.
도갓집의 자식들은 서울로 유학을 갔거나,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사장은 드라마의 사극에 나오는 노인처럼 흰 수염을 길게 기르신 분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분은 사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손녀의 이름을 붙여 ‘수경이 할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길을 가다 그분을 만나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공손하게 인사를 할 정도로 위엄도 있었습니다.

​수경이는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늘 집에만 있었습니다. 수경이 할아버지는 가끔 냇가 둑방으로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수경이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수경이 할아버지가 동년배들과 나무 그늘 밑에서 부채질을 하며 담소를 하고 계실 때도 으레 수경이도 보였습니다.
수경이는 또래들보다 키가 컸습니다. 얼굴도 제 아빠를 닮아서 잘생겼습니다. 눈동자만 총명해 보인다면 도시에서 온 아이처럼 또래들의 선망을 받을 정도입니다. 수경이는 할아버지들하고 있을 때에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습니다. 할아버지를 따라서 집으로 갈 때도 연신 여기저기를 살피다 아는 얼굴이 보이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느 때는 제 이름을 크게 부르며 어디 가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수경이가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수경이 할아버지가 옆에 계셔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못 들은 척했습니다. 훗날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우연히 수경이를 봤습니다. 중년이 된 수경이가 어린아이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때서야 어렸을 때 수경이가 제 아름을 불렀을 때 살갑게 대답해 주지 못한 것이 무척 미안해졌습니다.
설날 차례가 끝나면 아버지께서 세배를 다녀야 할 집을 말씀해주십니다. 대부분 아버지 친구분들이십니다. 먼 곳에 사는 친척 어른들께는 정월 대보름날까지 세배를 드리러 갑니다. 수경이 할아버지는 아버지 친구 분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이 드셨지만 반드시 세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이나 딸의 모습을 볼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제 기억으로도 수경이 할아버지의 이들이며 딸들은 모두 키가 훤칠하게 컸습니다. 그때만 해도 설이나 추석에는 어른들이 한복을 입으셨습니다. 그분들은 양복이나 양장차림이었습니다. 너무 멋있어서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멋있었습니다.

​수경이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채 방문을 열면 훈훈한 열기가 훅 뿜어져 나오면서 바짝 긴장이 됩니다. 수경이 할아버지는 늘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세배 온 아이들을 반기셨습니다.

​“네가, 누구 둘째 아들인 게로구나.”

​세배를 하고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수경이 할아버지는 일일이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시며 누구 아들인지 확인을 하십니다. 올해는 공부 잘하고 건강해야 한다, 라는 식의 덕담을 하신 후에는 세뱃돈을 일일이 나누어 주십니다. 때로는 세뱃돈 이외에 밤이나 대추 같은 것을 서너 개씩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대문을 나서자마자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세뱃돈을 꺼내서 다시 확인하며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습니다.

​수경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채 일 년이 안 돼서 술도가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습니다.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가서 도갓집으로 우물을 길러가지 않아도 되니까 대문은 항상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해마다 석류나무는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어서 주먹만 한 열매를 맺는데 어느 때부턴가 기와지붕에는 잡초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이면 서리를 맞은 잡초가 누렇게 죽어 있는 것이 폐가처럼 보였습니다.

​방문을 열면 온기가 훅 뿜어져 나오던 사랑채는 창고처럼 사용하는 것 같고, 우물은 나무뚜껑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넓은 집에는 수경이와 나이 많은 친척할머니가 그림자처럼 사는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때는 사무를 보는 서기가 두 명씩이나 있고, 술배달꾼이 십여 명이던 술도가도 주인이 몇 번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혼자 막걸리를 만들고, 포터 트럭으로 배달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핸가 일부러 막걸리를 발효시키던 지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5촉짜리 희미한 전등 밑으로 쌀 한 가마니가 들어가던 커다란 술독 이십여 개가 음산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막걸리 냄새 대신 습한 곰팡이 냄새만 진하게 풍기기도 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