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와 셰익스피어 [권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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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셰익스피어

2020.12.10

최근 한국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시장은 물론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그야말로 초유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국어 노래로 빌보드 1위라는 전례 없는 결과를 낳더니 급기야 세계적 권위를 지닌 음악상이라 여겨지는 그래미 본상의 후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BTS의 이런 놀라운 약진을 지켜보며 필자는 문득 2년 전 그들에 대해 한 문학 평론가가 권위 있는 문예지에 실었던 논평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당시는 BTS가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빌보드 시상식에서 공연하는 등 세계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 위력에 놀라 다양한 분야의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 현상에 대해 나름의 진단과 해석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이 논평의 필자는 “BTS(방탄소년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가사의한 한국인”이라고 규정하고, “세계에 한국문화를 널리 알린 한국인이 아니라 세계에 세계문화를 가장 현란하게 보여준 한국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인인가? 세계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최근 한류의 성공 요인을 “세계의 대중문화의 추세가 요구하는 동작과 감각을 가장 자극적으로 혹은 집약적으로 표현한 데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적인 문화와 예술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같은 변별성을 확보하고 있는지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언급도 하였습니다.

셰익스피어 학자인 필자가 위 논평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영국이 자국의 문화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콘텐츠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총 38편의 극을 집필했는데 많은 나라의 신화, 역사, 민담, 문학 등에서 스토리를 차용해 왔습니다. 38편의 극 중 영국 역사나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10여 편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햄릿』도 영국이 아니라 덴마크의 역사에서 빌려온 이야기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극의 소재들만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극의 많은 특징들이 로마 극작가인 세네카의 형식을 따른 것입니다. 5막 구성, 약강5보격의 리듬을 지니고 각운은 맞추지 않는 무운시(無韻詩, blank verse) 형식, 유령이나 마녀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의 출몰, 장황한 대사 등이 모두 세네카의 양식을 답습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세네카는 거의 읽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셰익스피어 극들은 전 세계의 필독서이자, 애독서로 남아 있습니다.

154편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인 소네트(14행의 짧은 정형시로 주로 연정을 노래)로 셰익스피어는 세계 최고 시인의 반열에도 올라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네트도 원래 단테나 페트라르카 같은 이탈리아 시인들이 구축한 시 형식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형식을 차용하여 자기만의 시 세계를 구축했기에 지금은 ‘소네트’ 하면 단테나 페트라르카를 떠올리는 독자보다 셰익스피어를 떠올리는 독자가 더 많습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는 타국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그를 능가하는 작품들을 창출해낸 것입니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극 중 자국의 역사를 다룬 극들은-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다른 극들에 비해 인기가 덜한 편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플롯도, 형식도 외래문화에서 차용한 작품 속에 자신만의 극적 구조와 아름다운 시어로 당대 영국의 여러 사회 문제들을 담아내었습니다. 그런 그의 극들은 관객들이 그들 사회의 문제점들을 점검해보는 장(場)이었습니다.

미국식 힙합과 랩이 포함된 BTS의 노래는 분명 한국적 장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랫말의 상당 내용이 한국 젊은이들의 고민과 갈등,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처럼 그들은 외래문화의 '형식'을 차용했으나 그들이 다루는 '내용이나 정서'는 대단히 한국적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이 지닌 이 고민들이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서 전 세계 젊은이들이 공감하고 열광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팬들이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이유로 꼽는 것이 그들의 뛰어난 퍼포먼스 외에도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문학 평론가가 정통 문예지에 실은 위 논평에서는 그들의 '노랫말'에 대한 분석은 전혀 없었습니다.

필자가 위 논평에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이유는 “민망한 일이지만 대중문화가 이렇게 약진하고 있는 동안에 한국의 고급예술, 그중에서도 언제나 정신의 선봉에 서 있다고 자처하기를 일삼는 문학은 여전히 세계문학의 말석에 간신히 끼어 있을 뿐이다.”라는 주장에서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를 서열화한 점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고급문화로 소비합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당대 최고의 유흥이었던 연극 관람에 관객들을 끌어모으려는 상업 극장에 레퍼토리를 제공한 대중작가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극들은 당시 극장이 요구하는 것을 “가장 자극적으로 혹은 집약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많은 극들이 현대 어떤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의 플롯을 지니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 극들은 지금 인류의 귀한 문화 자산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니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의 선긋기와 서열화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만약 영국인들이 위 논평처럼 자국의 작가들에게 영국 고유의 문화를 전파하기를 요구했다면 셰익스피어라는 세계적인 문호가 탄생했을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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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권오숙

한국외대에서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국외대, 서울과학기술대 외래교수,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연구이사. 주요 저서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다』 『청소년을 위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와 후기 구조주의』,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등. 『햄릿』, 『맥베스』,『리어 왕』,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 『살로메』 등 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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