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예측, 그리고 오늘의 한국'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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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예측, 그리고 오늘의 한국'

2020.10.23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가끔 그 당시엔 크게 주목하지 않고 흘려보냈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며 감탄하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국의 미래를 예측했던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 1. 《The Year 2000》을 만나다

1968년경 국내 경제 상황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반면 그 무렵, 독일의 카메라점에 일본제 캐논(Canon)과 니콘(Nikon) 카메라가 등장하고, 유럽의 도시에서 일본산 자동차가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일에 살던 필자는 일본이 세계에 몰고 오는 세찬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문득, 독일 광공업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루르(Ruhr)의 행정 및 금융 중심지이자 문화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한 뒤셀도르프가 생각납니다. ‘작은 파리 뒤셀도르프(Kleine Paris Duesseldorf)’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 아름다운 도시에 ‘쾨알레(Koe-Alle, Koenigsalle의 약칭)’라는 번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주재하는 일본 상사 직원들의 부인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독일 사회에 일본의 위상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즈음은 우리나라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땅을 밟기 시작한 때라 거리를 활보하는 일본인들을 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무겁고 착잡해졌습니다.

뒤셀도르프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던 필자는 주말이면 앞서 말한 ‘쾨알레’에 들러 여기저기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 서점에서 《THE YEAR 2000》 (Herman Kahn, Anthony J. Wiener, 1968)이란 책을 발견했습니다. ‘향후 33년을 예상하는 프레임워크(A Framework for Speculation on the Next Thirty-Three Years)’라는 흥미로운 부제가 붙은 책이었습니다. 무심코 책을 살펴보다가 “산업혁명의 두 번째 파고(Second Wave of Industrial Revolution)”라는 도표에 이스라엘, 타이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과 함께 한국이 포함된 것을 보았습니다. 저자들은 한국의 풍부한 고학력 인력을 주요 근거 ‘팩트(fact)’로 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며 ‘미래학’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인식하고, 한국이 먼 훗날이긴 하지만 언젠가 산업국 반열에 오를 거라는 ‘예측’에 감동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일례로 국산 자동차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 암울하던 시절 책의 저자 허만 칸과 앤서니 비너는 오늘날 한국의 위상을 예견했던 것입니다.

# 2. “한국인이 몰려온다.”

그리고 10여 년 후, 미국 시사 주간지 <The Newsweek> (1977. 7. 14.)가 “한국인이 몰려온다! (The Koreans Coming!)”라는 머리기사를 표지로 장식합니다. 표지의 일러스트를 찬찬히 살펴보면, 맨 앞에 라디오와 계산기를 앞세운 인물이 등장하고, 산업 현장의 기술자들이 뒤따릅니다. 수산업 종사자, 방직 산업 종사자, 담배 엽초 관련자 그리고 조선 산업 일꾼 등이 그들입니다. (예측이라는 측면에서, 전자 산업을 선두에 내세운 것이 옳았다면, 조선 산업을 뒤에 배치한 것은 오늘날 한국 조선업의 상황과 비교해 약간 빗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이 머리기사를 본 필자의 해외 친지들의 반응은 “한국 대단하네!” 일색이었는데, 한편으론 ‘일본 하나도 버거운데, 한국까지……’라는 속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방 국가들은 일찍이 한국 산업의 발전을 예측했던 것입니다.

# 3.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 한국에 지는 이유’

그리고 다시 10년 후, 특이한 제목의 책이 출현합니다. 《日本이 美國을 추월하고 韓國에 지게 되는 理由》, (謝世輝 著, 金禧鎭 譯, 韓國經濟新聞社, 1985)라는 책입니다. 도카이대학(東海大學)의 대만계 일본인 교수이자 미래학자인 저자 사세키는 이 책에서, 일본이 특유의 집단적 근면성 덕분에 세계 최첨단 산업국으로 발돋움하겠지만 20세기 말이 되면 한계에 부딪히고, 21세기에는 한국이 새로운 산업인 컴퓨터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책이 나온 1980년대 후반은 한국에서 초보적인 워드프로세서 출현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이메일(e-mail)에 대한 개념조차 희박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사세키 교수는 “혹자는 한국인이 개인주의적 생각이 강하다고 부정적으로 깎아내리지만, 컴퓨터 시대에는 그 개인주의가 바탕이 된 창의력이 큰 장점으로 떠올라 일본을 추월하는 요소로 크게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오늘날 일본 사회의 전산 수준과 우리의 전산 수준을 일찌감치 예측했던 것입니다.

# 4. K-Pop의 위상

또 다른 예측도 있습니다.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2014. 4. 28) 문화면에 K-Pop 관련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는 K-Pop에 대해 소상하게 다루는 한편 ‘Smartphone-Pop’이라는 제목 아래 지금까지 TV 기기와 이동전화를 공급해온 한국이 이젠 음악 시장을 넘보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고 말합니다. 기사의 초점은 한국이 이른바 ‘문화 산업’에 진입했다는 데 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오늘날 전 세계 음악계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클래식 음악가와 함께 ‘BTS 돌풍’을 예견했던 것으로 필자는 생각합니다.

# 5. 코로나19 팬데믹과 한국

위와 같은 예측은 기적 같은 놀라운 사실로 이어집니다. 지난 3월 한 독일 친구가 조금은 고조된 목소리로 베를린의 일간지 <Der Tagesspiegel> (2020. 3. 28.)이 한국 관련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검사하고, 위치를 파악하고, 격리하다 (Testen, orten, isolieren). 독일연방 정부는 다음 단계 코로나바이러스와 투쟁을 기획하면서 한국을 본보기로 삼기로 했다 (Bundesregierung plant naechsten Schritt im Kampf gegen Coronavirus – Suedkorea wird zum Vorbild)”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요컨대 독일이 한국을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주관적이긴 하지만 필자는 지난 반세기 넘는 동안 독일 언론 매체에서 한국 관련 기사를 헤드라인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Der Tagesspiegel>의 경우 1면 상단 좌측에 대서특필했습니다. 참으로 희귀한 체험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선진국이 된 한국’을 더욱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오늘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여러 미래학자가 예측한 것에서 그리 멀지 않은 궤도의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에 허만 칸과 앤서니 비너가 30~50여 년 후 한국의 위상을 예측했다고 해도, 오늘날 자동차 산업과 조선 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평균 수준을 넘어 ‘초일등급’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세키 교수 또한 1985년에 30여 년 후 세계 전자 산업 분야에서 오늘 한국의 위상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도 필자는 두 미래학자의 높은 식견에 다시 한 번 큰 경의를 표합니다.
이와 함께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외쳐대던 우리 겨레의 함성이 문득 귓가에 울려 퍼집니다.

(주해: ‘자유칼럼’에 실린 필자의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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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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