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7조' 정치 때렸다"....국민들 오죽했으면..


"개그맨도 정치풍자 못하는 시대, '시무7조'가 정치 때렸다"


    “기해년 겨울 타국의 역병이 이 땅에 창궐하였는 바, 가솔들의 삶은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 그 이전과 이후를 언감생심 기억할 수 없고 감히 두려워 기약할 수도 없사온데 그것은 응당 소인만의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7조. 29일 오전 32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진인(塵人) 조은산이 시무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라는 제목처럼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상소문 형식을 취한 글은 27일 비공개에서 공개로 전환된 이후 하루 만에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1만 4000여 자에 달하는 글에는 1조 ‘세금을 감하시옵소서’부터 7조 ‘스스로 먼저 일신하시옵소서’까지 구구절절한 읍소가 녹아있습니다. ‘지금 힘써야 할 일’을 뜻하는 ‘시무(時務)’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9세기 통일신라서 첫 등장한 시무십여조 

시무의 등장은 9세기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제시합니다. 신라의 근간이었던 골품제로 인해 누적된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6두품인 그가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작인 ‘아찬’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중앙 귀족의 반발로 그가 주장한 개혁은 실행되지 못합니다. 효공왕이 즉위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 각지를 떠돌았죠. 『삼국사기』 열전에 최치원이 시무책을 올린 사실이 기록돼 있을 뿐 내용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당시 정황에 따라 신분제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룰 것이라 추측할 뿐이죠. 

 

경기 남양주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중앙포토]


그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입니다. 981년 즉위한 성종은 이듬해 5품 이상 관료들에게 국가 현안에 대한 의견을 청했습니다. 개혁세력과 지방세력 간 불화가 끊이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으로 인사와 행정을 맡고 있던 최승로는 ‘시무28조’를 써서 올렸습니다. 현재 28조 중 22조의 내용이 남아있는데요. 그중 7조가 불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신라 말기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ㆍ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도를 넘었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다”(18조)며 “광종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불사를 많이 일으켰다”(2조)는 지적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고려 성종이 먼저 청한 비판…시무28조 

『고려사의 재발견』 등을 쓴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박종기 명예교수는 “성종이 먼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상황에서 나온 ‘시무28조’와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서 나온 현재의 ‘시무7조’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시무28조는 성종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군과 신이 뜻을 함께하며 서로 보완하는 입장”이라는 설명입니다. 역시 고려사를 전공한 한 사학과 교수는 “척불론이 아닌 유불 공존에 가깝다.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공식 제안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 성종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유교 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익명으로 쓴 말장난을 최승로의 글과 비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두 글의 공통점도 적지 않습니다. 조은산의 ‘시무7조’는 “현 시세 11프로가 올랐다는 미 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며”(김현미 국토부장관), “해 괴한 말로 백성들의 기세에 찬 물을 끼얹고”(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미 천한 백성들의 애 간장을 태우고 있사온데”(추미애 법무부 장관) 라며 현직 정치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합니다. “증세로 백성을 핍박한 군왕이 어찌 민심을 얻을 수 있겠냐”며 “부디 망가진 조세 제도를 재정비하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달라”(1조)거나 “다주택자와 고가주택 거주자를 잡아 족치시어 무주택자의 지지율을 얻겠다는 심산으로 자유를 박탈하시고”(6조) 등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부동산을 어찌하오리까


『고려사』최승로전에 기재된 시무28조.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서도 부동산은 핫이슈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의 집은 9척이고, 제후의 집은 7척이라 하였거늘 근래에는 사람들이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 짓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경쟁하듯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하게 되고 폐단이 매우 많다”며 “가옥의 제도를 정하고 이를 준수하게 하며 이미 지어졌지만 제도를 위반한 것은 헐어버리게 하여 후대에 경계하도록 하자”(17조)고 말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 고려는 ‘평등’으로 서로 다른 가치에 방점이 찍혀있지만 부동산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다른 항목에서는 ‘청하건대(請)’ ‘바라건대(願)’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과 달리 유독 ‘엎드려 청하건대(伏望)’라고 말한 점도 눈에 띕니다.  

 

이후 시무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나갑니다. 1196년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10조(封事十條)’라는 이름으로 폐정의 시정을 촉구하기도 하고, 조선으로 넘어가서는 1574년 이이가 선조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려 정사의 문제점 7항과 대안의 9항을 조목조목 서술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등을 쓴 부경대 사학과 신명호 교수는 “시무도 상소문의 일종인데 조선에 가서는 10가지, 20가지로 축약하지 못할 만큼 세세하게 적은 것들이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율곡 이이 초상화. [사진 파주문화원][사진 파주문화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신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명목을 만들어서 세금을 올리면 서민부터 타격을 입기 때문에 조세나 경제ㆍ사회ㆍ정치적으로 기회를 박탈하는 신분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나마 내용이 남아있는 것은 지도자가 받아들여서 역사에 기록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사라졌기 때문에 더 비판적인 내용도 많았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두터운 팬덤으로 풍자 실종…중우정치 우려

풍자가 사라진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방식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영수 교수는 “우리나라는 풍자의 전통이 약한 편이지만 서양에서는 광대가 금기를 깨고 다양한 현안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실상 정치적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광대처럼 왕 옆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인물이 존재했단 얘기인데요. 한국에서도 1972년 김지하가 쓴 담시 ‘비어(蜚語)’처럼 정권에 비판적인 작품을 쓰는 시인들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입니다. ‘비어’는 그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의 줄임말로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야릇한 소리가 자꾸, 자꾸만 들려와”라며 판소리 형식으로 부패한 특권층의 타락과 위선을 꼬집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정외과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강력한 팬덤이 풍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탄탄하게 결집한 세력에 의해 다수의 의견처럼 보이지만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등장하는 ‘중우정치’의 특징이라는 거죠. 이에 “개그맨이나 문인도 쉽사리 정치 풍자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통 시무 양식을 활용한 격조 높은 ‘시무7조’가 탄생했다”고 반겼습니다. 한국일보 인터뷰를 통해 ‘인천에 사는 두 자녀를 키우는 30대 가장’이라고 소개한 조은산에 대해서도 “운동권 출신이라고 하기에는 젊은 나이지만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보기에는 어휘나 문체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깡’으로 유머 더해…생산적 논의 이뤄지길


2017년 발표된 비의 ‘깡’ 뮤직비디오. [유튜브 캡처]




앞서 지난 5월 화제가 된 가수 비를 위한 ‘시무20조’도 있습니다. 10년 차 남성 팬이 유튜브에 올라온 ‘깡’(2017) 뮤직비디오에 댓글로 비 형을 향한 직언을 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재간둥이(꾸러기) 표정 금지”(1조), “화려한 조명 그만”(9조), “꼬만춤 금지”(11조) 등은 MBC 예능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성된 혼성그룹 싹쓰리에서도 종종 언급됐습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비의 ‘시무20조’ 이후 가수나 배우를 향한 팬들의 재치있는 조언이 이어졌다”며 “직접적으로 말하면 불편할 수 있는 부분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받아들이기가 한층 수월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국민청원의 효용성에 대한 논란은 남아있습니다. 이미 20만명 이상 동의를 얻어 청와대의 공식 답변 요건을 충족했지만, 여러 정책이 얽혀 있어 명확한 답변을 하기도 쉽지 않기 탓입니다. 정 평론가는 국민청원에 대해 “소통의 창구가 다변화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성격에 맞지 않는 글도 많아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특정 연예인에 대한 방송 출연을 금지해달라거나 반대로 출연시켜달라,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내용이 대표적이죠. 아무쪼록 이번 논의가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를 기대해봅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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