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차에 우리 이름을 [김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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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차에 우리 이름을

2020.08.29

사람과 비교할 바 아니지만, 자동차 역시 태어날 때부터 오롯하게 자기 이름을 가집니다. 단순한 상표권을 넘어서 ‘자동차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게 차 이름이지요.

부도 직전까지 몰린 기아산업을 되살린 차는 그 이름도 친근한 봉고(Bongo)입니다. 봉고의 인기 덕에 우리는 한참 동안 ‘원-박스카’ 형태의 미니밴을 “봉고차”라고 불렀습니다,

21세기 들어 자동차 문화가 빠르게 발달하면서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해졌습니다. 자연스레 차종도 많이 늘어났지요. 여기에 정부의 ‘수입선 다변화 정책’에 따라 차 시장도 개방됐습니다. 이전에 없던 신기한 차들이 속속 우리나라에 들어오던 때였지요.

차종이 많아지고 차 이름도 늘다보니 자동차 회사마다 모델명 짓기에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사람이야 동명이인이 존재하지만, 자동차라는 값비싼 소비재는 이름 하나가 상표 권리인 동시에 시장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지요.

1990년 등장한 ‘엘란트라’는 한국 땅에서만 그렇게 불렀습니다. 독일 차 가운데 ‘엘란트’라는 차가 있었는데요. 그 탓에 현대차 엘란트라는 수출 모델명을 ‘란트라’로 바꿔야 했습니다.

2018년 현재 세계 최대 차 시장은 연간 판매량 3,500만 대인 중국이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연 1,800만 대)이 시장의 패권을 쥐고 있었지요. 그래서 많은 차 회사들이 미국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차를 개발했습니다. 물론 차 이름도 그들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골라내느라 밤잠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은 차 이름의 대부분을 스페인어에서 가져왔습니다. 영어권 소비자들에게는 스페인어가 그렇게 멋진 단어로 들린답니다. 결국, 한국 차도 스페인어에서 착안한 갖가지 이름을 쓰기도 했지요.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대우차 에스페로, 씨에로 등이 대표적입니다.

자동차 회사별로 차 이름을 짓는 ‘룰’도 있습니다. 예컨대 현대차 SUV 이름은 모두 미국의 지역명입니다. 팰리세이드와 싼타페, 투싼, 베뉴 등이 그렇습니다.

살펴보면 기아차 SUV의 이름도 이런 룰을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알파벳 S인데, 쏘렌토와 스포티지, 셀토스, 쏘넷, 스토닉 등이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고급차로 분류된 모하비를 제외하면 모두 S로 시작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녔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세기말을 앞두고 세계 시장에서 우리 자동차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고인이 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자동차에 순우리말을 강조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등장한 차가 대우자동차의 중형차 레간자와 준중형차 누비라입니다. “중형 세단 시장에 강자가 나타났다”는 의미를 담은 ‘레간자[來强者]’, 수출 길에 올라 널리 세계를 누비라는 뜻의 ‘누비라’입니다. 쌍용차의 단종된 무쏘(Musso) 역시 우리말 ‘무소’에서 따왔습니다. 3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으나 “무쏘~오”라는 이름은 지금도 입에 착착 달라붙습니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6대 자동차 생산국입니다. 현대기아차의 생산 규모는 5위권에 올라선 지 오래됐지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위한 자동차를 만들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수출에 매달리다 보니 미국 또는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신차를 개발해 왔습니다. 디자인도, 그리고 차 이름도 우리 문화 대신 그들의 문화를 우선했던 것이지요.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5년 미군이 버린 지프들을 주워다 재조립해 만든, 국내 최초의 양산차는 ‘시-바ㄹ’(상표권 디자인상의 표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라면, 응당 우리말로 된 차 이름 하나쯤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당신들은 다국적 기업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기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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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준형
이투데이 산업부 자동차팀장
1975년 전북 전주 출생. 전주고, 전북대 졸.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신문출판 전공). 1999년 월간 <자동차생활> 취재기자로 자동차 저널리즘 입문. 2009년부터 경제신문 이투데이 근무. 현재 산업부 자동차팀장(차장). 저서: <자동차 기업의 거짓말>(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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