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추억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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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추억

2020.05.07

그날도 한탄강 물줄기는 하늘빛을 받아 맑고 푸르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보리가 미처 여물기 전, 그래서 보리밭도 파랗게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둑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윤용하의 ‘보리밭’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저 노래를 듣게 되다니? 나도 몰래 양 볼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습니다. 군복을 입고 부대로 돌아가는 병사의 꼴이라니…

처음 받아본 유격훈련은 그야말로 도깨비굴에 뛰어든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외줄다리를 배치기로 밀어 건너기, 세줄다리 건너기, 밧줄을 당겨 급경사의 나무판 오르기… 물론 옳게 해낸 종목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엎드려뻗쳤다가 쪼그려 뛰었다가 무릎을 꺾고 오리걸음 하다가 원산폭격(정수리와 모둠발을 땅에 대고 버티기)까지… 사이사이 유격체조인지 도깨비춤인지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종일 빨간 모자 유격대 조교들에게 휘둘리다 보니 넋이 빠져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훈련이 끝났다고, 알아서 부대로 돌아가라고, 그 소리에 비로소 물먹은 솜처럼 나사 풀린 기계처럼 퍼져 앉고 말았습니다. 오리 정도의 귀대 발걸음도 천근만근이었습니다. 흐르는 강물, 출렁이는 보리 이삭을 굽어보며 절로 처연해지던 심사에 ‘보리밭’ 선율이 돌멩이처럼 날아든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오월은 참으로 눈부셨습니다. 위병소로부터 “방 일병, 면회!” 하는 전화를 받고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내달렸습니다. ‘보나 마나 작은형이겠지,’ 꽁보리밥 점심에 쓰잘데없는 사역은 면하게 됐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한 해 먼저 입대한 형은 이웃한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미 육군에 파견된 한국군) 병으로 복무 중이었습니다. 매일 빵과 버터, 고기와 과일로 포식한다는 형은 도로 공사에 나선 국군 병사들을 노무자인 줄로만 알았다며 동생의 졸병 생활을 측은해하던 터였습니다.

뜻밖에 부대 앞에서 기다리는 이는 함지박만 한 음식 그릇을 이고 계신 어머니였습니다. 저 무거운 것을 이고 이 먼 시골 부대까지… 한동안 멍해져 인사도 제대로 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형에게 먼저 기별해 안내를 받으셨던 모양입니다.

형과 내가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지만 어머니는 “군복에 음식 그릇이라니”, 한사코 마다하시며 그 무거운 것을 머리에 인 채 보리밭 사잇길을 걸었습니다. 한탄강이 내려다보이는 둑방 옆 나무 그늘에서 세 모자가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었습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 가슴속에 겹겹이 쌓아두었던 빙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를 들을 테냐?” 홀로 다섯 남매를 키우시며 언제나 호랑이같이 무섭기만 했던 어머니. 생계 꾸리기에 바쁜 탓에 이 아들을 찾아주신 건 딱 세 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웅변대회 대표로 뽑혔다가 발목이 접질려 대회는 못 나가고 도리어 담임선생님이 사 주시는 위로의 설렁탕을 얻어먹었을 때, 그 얘기를 전해 들으며 아무 말씀도 않으시더니 이튿날 와이셔츠 한 장을 사 들고 처음 아들 학교를 찾아 담임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습니다. 논산 훈련소 얼어붙은 땅바닥을 박박 기어 6주간의 첫 훈련을 끝내고 부산에서 막 2차 교육을 받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번처럼 음식을 한 보따리 싸 들고 찾아주셨습니다.

“내가 하늘을 날고 싶었는데…” 이따금 장탄식에 놀라곤 했지만 정말 젊은 시절 꿈과는 너무도 다르게 살아야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동란 와중에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들을 홀로 떠안은 어머니, 그 고통과 슬픔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날개옷을 잃어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했다는 선녀처럼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붙들려 꿈은 천상에, 몸은 궂은 땅에 머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월이 되면 한탄강 둑길에서 들었던 보리밭 선율이 떠오릅니다. 그 둑길 옆으로 파랗게 물결치는 보리밭 사이를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걸으시던 어머니 모습도 떠오릅니다.

오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하지요.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함께 모인 달입니다. 요즘엔 도리어 가족 해체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가족을 많이 생각하게 하는 달입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도 어느덧 15년. 형제자매들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모임도 점점 뜸해집니다. 사는 곳도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엔 그 품으로 모여 들곤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오히려 자식들을 쫓아가며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게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살아계실 때엔 의식하지도 못했었는데 어머니의 큰 울타리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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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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