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경주 대회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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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경주 대회

2019.12.18

요즈음 산골 초등학교 운동장은 학생 수가 적어서 썰렁하기 그지없습니다. 운동장만 썰렁한 것이 아닙니다. 수업을 하지 않는 교실에는 상담실, 벤드 연습실, 창의놀이 교실 등의 팻말이 붙어는 있지만 거의 비어 있습니다.

시멘트나 나무바닥이던 복도엔 카펫이 깔려 있고, 책상은 커다란 원형 테이블로 변했고, 칠판도 백묵 대신 마커를 사용하는 화이트보드칠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수업환경만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등하교는 스쿨버스가 있어서 자가용처럼 타고 다닙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일곱 살짜리 1학년도 10리 길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놀다보면 하루 10리 길 정도는 예사로 걸어 다녔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요일이었습니다. 또래들 3명과 장터에서 놀다가 한 친구의 제안으로 읍내에서 열리는 자전거 경주 대회 구경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 시절 자전거를 주로 타는 사람들은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 파출소 순경, 출장을 다니는 면서기,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배달하는 술 배달부, 살아 있는 돼지를 새끼로 묶어서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다니는 돼지장수 정도였습니다.

면소재지 동네에서 자전거대회가 열리는 읍내까지 거리는 40리가 넘는 17km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무작정 신작로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길가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칼싸움을 하고, 장난을 치고 도망치면  쫒아가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걸었습니다.

무려 3시간 만에 도착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대목 장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운동장에는 별의별 장사꾼들이 다 와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울타리 쪽에 진을 치고 있는 차일 밑에서 막걸리며, 국밥이나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주머니에 1원짜리 하나 없이 무작정 읍내까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른들이 국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까 40리 길을 걸어온 뒤라서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 데다 빵 한 개 사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니까 배가 더 고팠습니다. 배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네에 사시는 어른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날은 왜 그렇게 더운지 늦봄인데 한여름처럼 더웠습니다. 아이스케이크 장사는 아이스케이크통 뚜껑을 닫기가 무섭게 다시 열어서 팔고 있었습니다. 배는 고프지, 날은 덥지 동네 어른들은 보이지 않지 대책 없이 읍내까지 걸어온 후회가 눈물이 나도록 밀려왔습니다.

집에 있었으면 점심을 먹고 산이나 들로 놀러 다닐 시간에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니고 있자니 점점 기운이 빠졌습니다. 웬만하면 동네 어른들을 만날 것도 같은데 운동장을 몇 바퀴 돌아도 한 분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물에서 물로 배를 채우고 나니까 움직이는 것조차 싫어졌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흙먼지로 범벅을 한 얼굴에서는 땟국이 흐르고 있었지만 닦는 것도 귀찮았습니다.

“어! 느덜이 여길 웬일이냐?”

친구 중 한 명이 배고픔과 피곤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누군가 앞에 멈췄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술 배달하는 아저씨였습니다. 우리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깜짝 놀랐다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구경 왔슈.”
“그려? 덥지. 아이스케이크 한 개씩 사 줄까?”

술 배달하는 아저씨는 야속하게도 점심 먹었느냐는 말은 묻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곁을 지나가는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불렀습니다.

“이따 장거리 경주하는 거 보고 갈 테지?”

술 배달하는 아저씨는 뭐가 바쁜지 아이스케이크 값을 지불하자마자 바쁘게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행여 한 방울이라도 떨어트릴까 봐, 아이스크림 밑에 손바닥을 대고 조심스럽고도 황홀하게 먹어치웠습니다.

아이스케이크를 먹고 나니까 위장이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전거 경기가 재개 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트랙 근처로 몰려갔지만 우리는 구경 따위는 포기해버렸습니다. 점심을 얻어먹는 건 글렀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느냐? 동네 어른들을 찾아서 버스비라도 얻어서 편하게 가느냐, 세 명이 의논을 했습니다. 결론은 동네 어른들을 요행히 만났다 치자. 술 배달하는 아저씨처럼 아이스케이크나 한 개씩 손에 들려주면 배가 고파서 집에 가는 길이 더 힘들게 된다는 쪽으로 났습니다.

세 명은 힘없이 교문 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교문 앞으로 가다가 동네 어른을 만났습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홍시처럼 빨간 얼굴로 우릴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구경 안 하고 어딜 가는 거냐?”
“지, 집에 갈려고유…”
“차비는 있냐?”
“어, 없슈…”
자전거대회 구경 가자고 제안을 했던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주머니에서 십 원짜리 석 장을 내미셨습니다. 버스 정류소가 있는 쪽을 손짓하시며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이걸로 짜장면 사 먹고 집에는 걸어서 가자.”

돈을 받은 친구가 교문을 나서자마자 제안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말이 없었고, 저는 밥은 집에 가서 먹고 버스를 타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교문 앞에서 한참을 다투다 나중에는 가위바위보로 결정을 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짜장면을 사 먹자는 친구가 가위를 내고 저는 보를 냈습니다.

우리는 쭈빗 거리는 걸음으로 짜장면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니까 짜장면 가격이 15원씩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박수를 쳐야 했는데 짜장면 냄새를 맡은 뒤라서 짜장면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서운했습니다.

“그냥 앉아라.”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들의 몰골이 불쌍해 보였던지 짜장면 가격을 10원씩만 받겠다고 했습니다. 주인아주머니의 배려로 우리는 짜장면 한 그릇씩을 말 그대로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습니다.

짜장면을 먹고 난 우리는 막상 40리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막막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어쨌든 걸어가기는 가야 하는데 얼른 일어서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빈 짜장면 그릇을 앞에 두고 보리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눈치를 봤습니다.
그때 밖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뛰어나가 보니 자전거를 탄 청년들이 힘차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자전거가 달리는 쪽은 우리 동네 가는 쪽이었습니다.

신사용자전거, 짐자전거를 탄 고등학생, 청년, 아저씨, 아주머니 등 나름대로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사람들이 도로를 가득 채우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술 배달하는 아저씨도 모자를 거꾸로 쓰고 힘차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술 배달 아저씨를 따라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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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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