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조 굴리는 국민연금 CIO, 최고점 후보 탈락 미스터리
625조 굴리는 국민연금 CIO, 최고점 후보 탈락 미스터리
[단독인터뷰] 곽태선 전 대표
전혀 예상치 못한 탈락...경쟁자 없었어
이민 1.5세대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장하성이 지원 권유, 김성주 이사장도 전화
시간 끌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 탈락시켜
이런 식이면..대통령·총리가 면접해라"
국민이 맡긴 625조원의 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최고투자책임자(CIO)인 기금운용본부장 자리는 지난해 7월 이후 1년 가까이 공석이다. 강면욱 전 CIO가 인사 책임 등을 이유로 사표를 낸 뒤 지난 2월 국민연금이 CIO 공모에 나섰으나 "적격자가 없다"는 이유로 이달 중 재공모 절차를 밟기로 한 상황이다.
'국민연금 CIO 논란'은 상반기에 진행된 CIO 공모 과정에서 줄곧 1순위로 꼽혀온 곽태선(60)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가 탈락하면서 더 커졌다.
국민연금 CIO에 내정됐다 떨어진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가 2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국민연금이 3일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곽 전 대표는 CIO 자리에 지원한 16명 후보자 중에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곽 전 대표가 내정됐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왔지만, 공모 결과 발표는 두 달 넘게 미뤄졌고 가장 유력했던 곽 전 대표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했다.
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곽 전 대표는 국민연금 CIO 공모에 지원하기 전 청와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그는 "청와대의 권유를 받았기 때문에 내가 반드시 CIO로 선임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만 끌다 마땅한 이유 없이 떨어진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CIO 공모 과정이 시작되기 전인 1월 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장 실장은 예전에 각종 주주총회와 강연장에서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서로 전화를 할 만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전화로 CIO에 내가 좋을 것 같다며 지원하기를 권유했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나를 좋게 봤다고 하더라. 나는 장 실장에게 '업계에 있을 때부터 숱하게 봐왔지만, CIO 자리는 정치권에 많이 휘둘리더라.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장 실장은 '곽 전 대표는 학연·지연이 없다는 점이 더 좋게 보인다'고 말했다."
곽 전 대표는 CIO 공모에 지원하기 전 청와대 인사수석실에서도 연락이 왔었다고 밝혔다. 인사수석실에서는 "지원서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나 전화 달라"며 "일단 3배수에는 올라오셔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곽 전 대표는 "100% 공정하게 경쟁하기를 원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민 1.5세대인 곽 전 대표는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으로 베어링증권과 세이에셋코리아자산운용을 거쳐 베어링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를 역임했다. 그가 1억7000만원으로 세운 투자자문사 베어링자산운용은 이제 수탁고가 10조원이 넘는 회사가 됐다. 곽 전 대표는 2016년 말 대표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업계에서 여전히 입지전적인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그가 인수·합병(M&A) 변호사로 법 지식이 해박한 데다 외국계 회사를 여러 곳 거쳐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는 점에서 CIO에 적격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국민연금은 지난 수년간 해외 주식 투자 비중을 크게 늘리고 있다.
"4월에 면접을 보기 전 국민연금공단 인사혁신실에서 연락이 와 '면접이 영어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말해줬다. 여의도 켄싱턴 호텔에서 기금이사추천위원회 사람들에게 면접을 봤다. '중국 시장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라'는 질문도 받았다. 면접 다음 날 기금이사 추천위에서 내가 최종 후보자라는 사실을 알려왔다." 곽 전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곽 전 대표를 비롯해 윤영목 제이슨인베스트먼트 고문, 이동민 전 한국은행 외자운용원 투자운용부장이 면접을 통해 CIO 최종 후보 3인에 올랐다. 곽 전 대표는 이후 부동산·예금 현황 등 기금이사 추천위에서 요구한 자료들을 추가로 제출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중앙포토]
석달 간 이유없이 CIO 선정 미뤄져
CIO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였던 지난 4월 하순에는 김성주 이사장이 후보자였던 곽 전 대표에게 직접 연락을 하기도 했다고 곽 전 대표는 전했다. 곽 전 대표는 국민연금공단 본사가 있는 전주에 내려가 김 이사장과 만나 앞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운영 방향에 대해 의논했다고 한다. 곽 전 대표는 이 모든 과정을 본인이 내정된 것으로 이해했다. 김 이사장은 곽 전 대표에게 "CIO에 취임하시면 바빠지실테니 미리 알고 싶어서 연락했다"며 "6월 중순에 예정된 해외 출장도 같이 갔으면 한다"며 업무를 논의했다.
그러나 CIO 선정은 계속 미뤄졌다. 지난달 중순에도 국민연금은 "3명 최종 후보에 대해 인사 검증을 진행하고 있다"는 대답만 내놨다. 국민연금 CIO는 이사장이 최종 추천인을 선정해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제출하고, 복지부 장관이 승인하면 이사장이 임명하는 절차를 거치게 돼 있다. 통상 3~4주 걸리는 인사 검증 기간이 두 달 넘게 소요되자 공모 절차를 둘러싼 각종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곽 전 대표는 일각에서 제기된 본인의 국적·병역 문제에 관해 설명했다.
"1990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나이 때문에 3주 민방위 훈련으로 병역을 대체했는데 혹시 이 부분이 문제가 될까 싶어 자료 맨 앞장에 첨부했다. 한국투자공사(KIC)는 아예 외국인을 CIO로 영입한 적도 있다. 그럼 나 같은 이민 1.5세대는 그럼 애초에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게 나았던 것이냐."
국적은 공모 과정 초기에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던 부분인데, 이 문제 때문에 최종 CIO 선임이 몇 달 걸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다는 것이다.
"흠결 잡기만 바빠…인재풀 넓어질 수 없을 것"
김성주 이사장은 지난달 초 곽 전 대표와 통화하며 "임명이 어려울 것 같다"고 알려왔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외유성 출장 논란 등으로 사퇴하면서 기준이 엄격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곽 전 대표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결격 사유가 없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김 이사장에게 말했다. 결국 지난달 27일 기금이사 추천위는 곽 전 대표에게 CIO 탈락 사실을 공식 통보했다. 공모 과정을 개시한 지 넉 달 만이었다.
곽 전 대표는 "몇 달간 선정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 나를 탈락시킨 것은 결격 사유가 누구한테나 보여줬을 때 납득할만한 이유가 아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독립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숱하게 나오지 않나. 전문성·독립성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처럼 아무런 연고 없이, 이해관계에 대한 빚도 없이 들어온 사람이라면 유연성이 없을 것이라고 위에서 판단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디까지나 다 추측이지 내가 탈락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CIO 선임 절차에 대해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지만 보이지 않게 간섭을 하는 식으로 공모 절차를 진행할 바에야 차라리 대통령·국무총리가 CIO 후보자 면접을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또 "적격자를 찾기 위해 인재풀을 뒤지는 방식이 아니라 어떻게든 흠집을 찾아서 후보자들을 지금처럼 떨어뜨리기만 한다면 한국의 인재풀은 절대 넓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중앙포토]
곽 전 대표는 국민연금에 대해서도 "현재와 같은 지배구조 밑에서는 주어진 5대 원칙(수익성·안전성·공공성·유동성 운용의 독립)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3일 김승희 의원실이 공개한 국민연금의 '기금이사 지원자 심사 관련 자료'에서 곽 전 대표는 서류 심사와 면접 심사에서 각각 91.3점, 93.8점을 받아 다른 후보들을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후보자들의 최종 탈락 사유에 대해 국민연금은 "사생활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김승희 의원은 "이달 말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등을 앞둔 국민연금이 정권의 '코드'에 맞는 인사를 찾으려는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은 4일 기금이사 추천위원회를 다시 개최하고 CIO 재공모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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