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 92세로 별세
김종필 전 국무총리, 92세로 별세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3김(金)’
한국 정치사(史) 획 그은 인물 평가
김종필(金鍾泌·92) 전 국무총리가 23일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김 전 총리는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3김(金)’으로 불리며 한국 정치사(史)의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3김은 서로의 정적이자 라이벌이었지만, 때로는 조력하기도 했다. 2009년 DJ, 2015년 YS 서거에 이어 김 전 총리까지 이날 영면에 들면서 3김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YS, DJ 등 정치적 거물 사이에서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하며 각 정권의 탄생 등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지만 박정희·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총리만 6년 반을 했던 김 전 총리를 향해 ‘영원한 2인자’,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 등의 별칭이 붙기도 했다.
김종필 전 총리. /조선일보 DB
1926년 충남 부여의 부유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를 나와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을 지내는 등 주로 참모직을 역임했다. 1961년 중령이던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쿠데타에서 중심 인물로 참여했고 그 뒤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맡았다.
김 전 총리는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회담을 갖고 한일 국교 정상화의 물꼬를 트기도 했지만 이후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야인’으로 생활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63년 준장으로 예편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김 전 총리는 이후 7·8·9·10·13·14·15·16대에 걸쳐 총 9선을 지낸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정치권에 복귀했다.
공화당 총재였던 김 전 총리는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YS의 통일민주당과 함께 ‘3당 합당’을 선언했다. DJ는 당시 3당 합당을 ‘야합’이라고 규정하며 반대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YS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 전 총리는 민자당 대표에 올랐다. 그러나 3당 합당 시 약속했던 의원내각제 추진은 요원했고, 김 전 총리는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총재로 취임했다.
김 전 총리의 자민련은 충청 지역에 기반을 뒀고, 김 전 총리는 ‘충청의 맹주’로 불렸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의 국민회의와 김 전 총리의 자민련은 야권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이른바 ‘DJP 연합’이었다. DJ는 15대 대통령이 됐고, 김 전 총리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김 전 총리와 YS·DJ와의 관계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변했다. 김 전 총리는 YS를 공화당에 합류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으나 YS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총리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YS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다.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하니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DJ의 의원직을 박탈했고 그가 수장으로 있었던 중앙정보부는 1973년 DJ를 일본에서 납치하기도 했다. 정치적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던 3김이 때로는 3당 합당과 대선 후보 단일화 등으로 조력한 것이다.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노렸다. 김 전 총리는 자민련의 비례대표 후보로 선거에 나섰지만 당선에 실패했다. 10선 도전에 실패한 김 전 총리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많은 사람들이 김 전 총리를 ‘한국 정치사의 풍운아’로 일컫는다. 김 전 총리는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영욕의 부침을 거듭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앞서 본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김 전 총리에 대해 “김종필은 5·16 군사혁명의 주역이고 그 혁명을 성공시킨 당사자이지만, 내가 알기에 그는 한 번도 정치나 정권에 집착하지 않았다”며 “(김 전 총리가) 군사혁명을 자랑하지 않았고 ‘이 나라 역사에 다시는 혁명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 명예교수는 “낭만적 정치인 김종필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면 좀 더 합리적인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가 대권을 잡았더라면 한국 정치가 오늘의 이런 꼴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열린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서울아산병원. 발인 27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3/20180623008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