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일본에서 사라지는 숟가락, 한국에만 있는 이유

한국문물연구원 정의도 원장 
'한국고대숟가락연구' 출간 
생활도구 매개로 문화사 훑어

 

 

한국문물연구원 정의도 원장이 조선 전기 청동 수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사람 입이 닿은 부분이 부식된

조선 전기 청동 수저.

강원태 기자 wkang@

케이콘텐츠 


 

발굴만 하면 숟가락이 쏟아져 나왔다.

거의 대부분의 고분에서 숟가락이 대거 출토되었다.

 

다들 '너무 흔해서' 지나쳤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시대까지. 한데, 밥상의 필수품인 숟가락이 중국산 일색이었다. 그 수수께끼에 딱 한 사람이 주목했다.

 

한국문물연구원 정의도 원장. 그는 고분 속에서 찾은 숟가락을 집어들고 고대사를 파고들었다. 8년 동안 쓴 논문을 추렴한 결과를 '한국고대숟가락연구'(경인문화사, 5만 9천 원)로 펴냈다. 숟가락 하나에 천착해 수천 년의 생활문화사를 훑은 연구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숟가락 연구는 삼국시대 청동숟가락의 등장과 확산에서부터 시작해 고려와 조선 후기까지 관통한다. 사이사이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의 숟가락까지 확장된다. 숟가락 하나를 쥐고 시공간을 무한정 넘나든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의 식탁에서 사라진 숟가락이 왜 한국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규명한다. 

 
사람 입이 닿은 부분이 부식된 조선 전기 청동 수저. 강원태 기자 wkang@


정의도 원장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중국 고고학 전문 잡지 '고고'와 '문물'을 꾸준히 수집했다. "출토된 고려시대 숟가락을 분석해 보니 중국에서 만든 소위 '메이드 인 차이나'더군요. 중국에서 건너온 숟가락의 역사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 원장은 1956년 중국에서 출간된 잡지를 쥐고 어떤 숟가락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었는지 일일이 비교해가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우리 숟가락은 중국에서 온 숟가락을 비슷하게 만들면서 시작했지만 결국 한국의 식탁에서만 살아남았다. 중국음식은 면 위주로 가면서 숟가락의 존재감이 희박해진 반면 젓가락의 길이가 길어졌다. 우리 식탁은 아직 국과 국밥의 비중이 커서 숟가락은 여전히 없어선 안 될 존재다.

 

숟가락의 역사는 한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숟가락을 잡아보면 주인이 어느 손을 자주 썼는지 읽힌다. 주인이 왼손잡이라면 숟가락의 오른쪽 부분이 많이 닳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숟가락을 쥐면 시대의 모습도 한 숟갈 퍼낼 수 있다. 고려 중기, 밥그릇 깊이가 얕았을 때는 떠먹기 쉽도록 숟가락이 휘어 있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숟가락 모양이 다양했다. 동그랗고 길쭉한 것에서 사다리꼴까지 여러 모양이 혼재하다가 16세기 중반에야 통일되었다. 그 배경에는 성리학이 있다. 하나의 기준과 원칙으로 통일하려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작용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숟가락의 모양도 성리학의 영향 때문에 만들어진 점은 특이하다. 성리학이 구현하는 예의 핵심인 제사 때 사용하는 숟가락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숟가락이 만들어 진 것이다. 다만, 요즘 쓰는 숟가락은 조선 후기 때와 비교하면 크기가 훨씬 작아졌다.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이 줄어서다.

 

정 원장은 프랑스에서 '신석기시대'를 전공하고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고고학과 함께하며 정 원장은 고고학이 사람을 이해하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그 시대는 어떻게 살았을까'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숟가락'은 공감하기 위한 매개였다. 

 

"오늘날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사람들이 애써서 노력하는 거 아닌가요. 옛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겠죠. 그러면 어떻게 먹었는지를 따라가면 그 사람과 사회, 시대를 읽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부산일보 조소희 기자 ss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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