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잃은 사람들의 한가위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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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잃은 사람들의 한가위

2014.09.05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름 붙은 날’ 글 당번이 되면 습관처럼 옛 글을 찾아보게 됩니다.

해마다 이맘 때면 태풍이 한차례 지나가지만, 고국은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어 갈 때이지요. 계절이 거꾸로 돌아가는 호주는 한국과는 반대로 봄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에는 아랑곳없이 제 마음은 슬그머니 한국의 가을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어찌 된 노릇인지 제 속에는 ‘거꾸로 가는 또 하나의 시계'가 있어 이민 햇수가 늘어갈수록 고국을 향해 내달리는 마음에 점점 속도가 붙어갑니다.

이곳 호주에서도 해마다 한가위 보름달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줄기 서늘한 구름을 거느리고 쪽빛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르는 쟁반 같이 둥근 달은 공해 없이 맑은 하늘 탓인지, 계수나무 옥토끼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차라리 서러운 감회를 불러일으킵니다.

‘고향 앞으로’를 부르짖으며 길을 나서기 무섭게 주차장을 방불케 하듯 도로를 꽉꽉 메우는 차량 행렬, 가지 수 많은 제수 장만과 친지들 치다꺼리로 골치가 지끈대는 명절 증후군, 빠듯한 휴가 일정 탓에 피곤만 가증된다는 투덜거림 등등, 모두가 함께하고 싶은 그리운 고국의 모습입니다.

올 추석에도 어김없이 찾아올 가슴 한편의 아릿함과 애틋함을 생각하면 여럿이 모여서 옥시글거릴 수 있다는 것만도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7년 전 추석을 맞으며 ‘호주의 보름달’이란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더군요.

이민 이후 내면에 장착된 ‘거꾸로 시계’가 연유야 어찌 되었건 작동을 멈추고 고국의 추석을 이태째 맞고 있습니다. 이제는 차라리 ‘호주의 보름달’이 그립다는 투정 섞인 감정 사치를 부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호주 동포사회에서는 추석의 의미가 한국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초연한 척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의 상실, 엄마의 부재가 명절을 맞으며 덧난 상처처럼 도드라진다면 정말 슬프고 고통스런 일일 테니까요.

최근에 가족을 잃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이름 붙은 날'이란 떠나간 빈자리를 아프게 기억해야 하는 시간, '머리'로 떠나보낸 과거가 실은 남은 자의 '가슴'에 붙박혀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명절이 다시 기다려지려면, 적어도 고문 같은 기억을 벗고 무덤덤하게 맞아지려면 아주 오래오래 아파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 가족을 잃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마치 내전 중인 듯 너무나 참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잇따라 겪었습니다. 유독 여리고 어린, 창창히 젊은 죽음이 많았기에 남은 자들은 지치고 무력하고 분노하고 우울한 채 매일매일 상실과 맞닥뜨려왔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피붙이와 내일 거짓말처럼 이별하면서 조급했던 우리의 성취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에 망연자실했습니다. 대명천지에 어린 것들 하나 지켜주지 못했고, 젊은 목숨 저렇게 스러질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말이나 말지,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비루하고 용렬한 싸움박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은 홀연히 제 갈 길을 갔던가 봅니다. 세상은 이렇게도 불공평하건만 세월은 아랑곳없이 공평하다는 것이 오히려 서럽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조차 사그라지는 듯한 허망함에 몸서리를 치는 동안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이제 초가을에 다다랐습니다.

올해 추석은 예년과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처연히 높은 하늘 너머와 무연한 달빛 아래에서 어린 원혼들을 달래며 애곡해야 합니다. 저처럼 호주의 보름달이 그립다는 따위의 자기 연민은 말할 것도 없고, 명절 후유증이 어쩌네 하는 ‘포시라운’ 소리는 입 시늉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일가붙이 무탈한 것에  고마워하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가족 잃은 이웃에 무심한 상처라도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연처럼 여여하고 숙연하게 추석을 맞을 일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은 우리, 자연에(게)서조차 위로받지 못한다면 너무 비참할 테니까요.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말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비밀을 알지 못하며, 인간은 자연의 품 안에 살면서도 자연의 이방인”이라고 한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서로의 이방인일지라도 자연의 이방인은 되지 않도록, 자연마저 우리를 내치지 않도록  올 한가위에는 달님에게 우리의 생채기를 싸매 달라고 빌어야겠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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