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여행]바다안개 흐르는 새벽 솔숲을 걷다 - 충남 태안 솔향기길
솔향기길은 가볍게 걷기에 좋다.
해먹에서는 유치원 나이로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앉아 바다를 내다본다. 바다는 모래사장에서 멀어질수록 흰 물감을 섞어놓은 듯 안개가 짙다. 수평선은 안개 때문에 아렴풋하다.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는 바다만이 연한 쪽빛을 띤다.
태안 솔향기길은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이 쪽빛 바다와 나란히 걷는 길이다. 솔향기길 1코스는 태안군 최북단 이원면 내리 만대항에서 시작해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안개가 걷히기 전의 숲을 걷고 싶어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에서 출발했다.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섰을 때에 오른쪽이 북쪽이다. 해수욕장이 끝나는 지점이 숲길 초입이다. 초입에는 길 코스 안내지도, 꾸지나무골 해수욕장 안내판, 식당 광고 안내판 등이 어지럽게 서 있다. 간판만 지나면 호젓한 숲길이다.
바다 안개가 숲을 부드럽게 만든다. 약간 붉은 빛이 도는 길 위에 솔가리(말라서 떨어진 솔잎)가 흩날렸다. 안개 때문인지 솔향기가 더욱 은은하게 풍긴다.
솔향기 가득한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은 원래는 꾸지뽕나무가 많아서 ‘꾸지나무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6·25전쟁 뒤에 사람들이 꾸지뽕나무를 베어 뗄감으로 쓰면서 모두 사라졌단다.
꾸지뽕나무는 없지만 안개에 싸인 소나무숲은 몽환적이다. 숲 전체가 꿈을 꾸는 듯하다. 우리 걷는 발자국 소리만 자박자박할 뿐이다. 길가에 노랑 원추리꽃이 환하게 피어 발걸음을 즐겁게 한다. 바다는 저만치 소나무 사이에 걸려 있다.
10여 분을 걷자 길은 숲을 벗어나 바다와 가까워진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갯바위가 인상적이다. 한 방향으로만 튀어나왔다. 바위에는 흑자색 반점이 많은 참나리꽃이 피었다. 10분 사이의 길에 숲은 원추리꽃을, 갯바위는 참나리꽃을 피워낸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안군은 한반도 중부 서해안에 자리한다. 동쪽만 서산시와 육지로 이어지고, 서남쪽과 북쪽은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다.
최북단 이원면 내리 만대항은 경기 덕적도와, 최남단 고남면 고남리 영목항은 보령시 원산도와 마주한다. 해안선 길이가 530.8킬로미터로 해안을 따라 30여 개의 해수욕장이 있다. 크고 작은 119개 섬들도 자리한다.
솔향기길은 태안반도의 리아스식해안을 따라서 과거 군부대 해안경계 순찰로, 오솔길, 임도 등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솔향기길은 5코스이고 솔향기길 6코스로 알고 있는 ‘안면송길’은 안면도에 별도로 조성된 길이다.
1코스는 만대항에서 여섬을 거쳐 꾸지나무골 해수욕장까지 10.2킬로미터, 2코스는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에서 가로림만을 거쳐 희망벽화방조제까지 9.9킬로미터, 3코스는 희망벽화방조제에서 밤섬나루터를 거쳐 새섬까지 9.5킬로미터,
4코스는 새섬에서 청산포구를 거쳐 갈두천까지 12.9킬로미터, 5코스는 갈두천에서 용주사를 거쳐 태안읍 백화산 냉천골까지 8.9킬로미터다. 최북단 만대항에서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남쪽 태안읍까지 이어지는 총 51.4킬로미터이다.
참나리꽃을 뒤로 하고 도투매기 언덕을 넘는다. 길이 해안 절벽 가까이에 있는지 점점 좁아진다. 소나무의 모습도 이전에 보았던 소나무와 다르다. 10분 사이 길인데 생태 차이가 난다.
오는 길에 보았던 소나무들은 한 층에 가지가 여러 개 뻗고 있었다면, 이곳 소나무 가지는 모두 서쪽을 향해 뻗어 있다. 다른 쪽에 자란 가지를 스스로 잘라내어 서쪽 가지만 살렸다. 그래서 양쪽으로 자란 소나무보다 훨씬 절박해 보인다. 소나무 언덕을 넘자 자드락 해안이다.
1코스는 작은 해안과 숲 언덕이 반복해서 이어지는 길이다. 자드락도 작은 해안이다. 작은 어리골로 향한다. 빈 가두리양식장으로 내려간다. 갈매기 여러 마리가 나무 다리에서 쉬다가 사람들 인기척에 놀라 바다를 향해 날아오른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작은 어리골 쉼터는 닫혀 있다.
길은 작은 어리골 쉼터 옆으로 이어진다. 언덕을 오르는데 풀섶이 살짝 움직인다. 뱀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걸음을 멈춰 보고 있자니 붉은 집게가 풀섶 사이로 반짝인다.
‘도둑게’다. 갯벌에서 사는 게가 아니라 산에 사는 게다. 산란기를 제외하고 산에 굴을 파놓고 산다. 사람들이 사는 집에 와서 음식을 훔쳐 먹는다 하여 도둑게라 불린다. 솔향기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등껍질 중앙이 입술 모양처럼 파여 있는데, 웃는 것처럼 보여 ‘스마일게’로 불린다. 집게 다리가 붉다. 파도가 거세면 ‘와랑와랑’ 소리가 난다는 와랑창에서 서산시에 산다는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다. 도둑게를 보고 귀엽다며 환호성을 지른다. 도둑게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많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도둑게가 1코스 마스코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덕을 넘자 다시 차돌백이 해안이다. 하얀 차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보다는 갯바위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굴이 더 많아 보인다. 갯바위 초입에는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잠시 둘러보고 다시 언덕을 오른다. 임도다. 솔향기길 1코스가 좋은 것은 시골 농로에서 자주 보는 콘크리트 길이 거의 없어서다.
용난굴 가는 임도가 콘크리트 길 전부다. 임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출발 전보다 푸르다. 그러나 수평선은 여전히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임도를 벗어나 용난굴로 향한다. 용의 전설이 전해지는 해식동굴이다. 용난굴 안에는 두 개의 굴이 있다. 용 두 마리가 각각 동굴방에 앉아 도를 닦으며 승천하기를 기원했다.
그런데 두 마리가 모두 승천한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용만 승천하고 다른 용은 승천하지 못했다. 승천하지 못한 용은 동굴 앞에서 망부석이 되고 만다.
갯바위 길을 지나 다시 작은 소나무 언덕을 넘는다. 중막골 해변이다.
언덕에 서 있으면 높이 20미터밖에 안 되는 여섬이 오롯이 보인다. 이원방조제 간척지 안에 든 섬들은 모두 육지가 되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섬이다. 여섬에 대한 안내판이 붙은 곳에서 사람들이 바지락을 잡는다. 돌앙뎅이를 지나면서 길이 살짝 가파르다. 앙뎅이는 ‘절벽’의 태안 사투리다. 가마봉을 지나면서 부드러운 길들이 이어진다.
안개 사이로 등대가 흐릿하게 보인다. 장안여에 세워진 등대다. 장안여는 육지에서 200미터 떨어진 섬이다. 이 섬은 물에 잠겼다 드러나기 때문에 장안여라고 불린다.
선박들이 지나갈 때 이곳에 섬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등표 등대가 서 있다. 이원면에 하나 있는 등대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서 오르고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풍경이 점점 단조롭게 보이는 것은 몸이 지친다는 증거다. 멀리 삼형제 섬이 눈에 띈다. 곧 만대항이다.
삼형제 섬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우애 좋은 삼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뻘일을 나가 돌아오지 않자 삼형제는 나란히 앉아 어머니를 부르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은 마음 때문인지 세 섬은 보는 위치에 따라 때로는 하나, 때로는 둘, 혹은 셋이 된다. 만대항에서 바위는 두 개로 보였다.
큰형은 기다림에 지친 막둥이를 보듬어주고 그 옆의 둘째는 그런 두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삼형제 섬에는 동요 섬‘ 집 아이’가 잘 어울린다.
‘섬집 아이’를 흥얼거리며 걸었더니 “걷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반긴다. 만대항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굴양식장이 나타난다.
물이 저만치 삼형제 바위까지 물러났다. 거대한 바다가 속살을 드러내며 일광욕을 즐긴다. 그 틈에 갈매기들이 날아들어 갯벌에 코 박고 이것저것 잡아먹기 바쁘다. 드디어 만대항, ‘많은 사람들이 살 곳’이라는 뜻의 항구에 닿았다. 그 사이 안개는 걷혔고 해안을 따라 걸어온 나그네는 허기가 진다. 솔향기에 취해 솔가리 자박자박 밟으며 잘 걸었다.
[위클리공감] |